짧은 이야기이고 큰 사건이나 복잡하게 얽힌 갈등이 없음에도 너무 재미있었다.
짧은 문장들 사이에 수많은 내 생각들이 끼어 들어갈 수 있어 좋았다.
읽는 다는 표현보다 본다 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이야기.
등장 인물이나 상황 설정이 얼마나 현실적인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엉성하기 그지없지만 읽는 내내 마음이 아팠고 마지막 장을 덮을떄 기분이 좋았다.
역시 청소년 소설은 언제나 후회가 없다.
엄마의 얘기가 다 끝난 뒤에도 할멈은 한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갑자기 표정을 바꾸었다.
- 네 엄마 말이 사실이라면, 넌 괴물이다.
엄마가 입을 쩍 벌리고 할멈을 바라봤다. 할멈은 내 눈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며 웃고 있었다. 입꼬리가 한껏 올라가고 눈꼬리는 아래로 축 쳐져서 입과 눈이 만날 것 같은 미소였다.
-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괴물. 그게 너로구나!
그리곤 내 머리통을 아프도록 쓰다듬었다. 그때부터 우리 셋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p.46
계속해서 나오는 표현이다. 우리 셋. 할멈과 엄마와 나. 이 이야기에서 상대방을 부를 때, 이름을 부르는 장면은 몇 번 나오지 않는다. 중간쯤 가면 주인공 이름도 낯설다. 이름으로 부르지는 않지만 그들은 서로를 부른다. 서로가 서로에게 느끼는 것을 고스란히 담은 표현들이다.
나에게도 있다. 나만의 부름이... 나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다 수 있는 그가 아니다.
할멈에게는 이른바 활자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그랬기에 없는 형편에도 어린 엄마에게 책을 많이 사 주었고 엄마가 '글자깨나 읽는 가방끈 긴 여자'가 되길 원했던 거다. 사실 할멈은 엄마가 작가가 되기를 바랐다고 한다. 더 나아가, 평생 결혼하지 않고 고독하되 멋있게 늙을 '여류' 작가가 되기를 바랐던 것 같다. 그건 사실 지난 세월을 되돌릴 기회가 주어진다면 할멈 자신이 살고 싶은 인생이었다. 엄마에게 '지은'이라는 이름을 지어 준 것도 그래서였다.
- 지은아, 지은아, 부를 때마다 멋들어진 글자를 지어낼 줄 알았는데, 똑똑해지라고 책을 많이 읽혔더니만 책에서 배운 게 겨우 무식한 남자랑 무모한 사랑에 빠지는 거였다니. 으이그...... . p.47
내 자식에 대한 열망. 자식이 없는 것이 내게 더 큰 행복이리라.
책은 내가 갈 수 없는 곳으로 순식간에 나를 데려다주었다. 만날 수 없는 사람의 고백을 들려주었고 관찰할 수 없는 자의 인생을 보게 했다. 내가 느끼지 못하는 감정들, 겪어보지 못한 사건들이 비밀스럽게 꾹꾹 눌러 담겨 있었다. 그건 텔레비전이나 영화와는 애초에 달랐다.
영화나 드라마 혹은 만화 속의 세계는 너무나 구체적이어서 더 이상 내가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영상 속의 이야기는 오로지 찍혀 있는 대로, 그려져 있는 그대로만 존재했다. 예를 들어, '갈색 쿠션이 있는 육각형의 집에 노란 머리의 여자가 한쪽 다리를 꼬고 앉아 있다.'가 책의 문장이라면 영화나 그림은 여자의 피부, 표정, 손톱 길이까지 전부 정해 놓고 있었다. 그 세계에 내가 변화시킬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책은 달랐다. 책에는 빈 공간이 많기 때문이다. 단어 사이도 비어 있고 줄과 줄 사이도 비어 있다. 나는 그 안에 들어가 앉거나 걷거나 내 생각을 적을 수도 있다. 의미를 몰라도 상관없다. 아무 페이지나 펼치면 일단 반쯤 성공이다. p.49-50
- 뭐든 여러 번 반복하면 의미가 없어지는 거야. 처음엔 발전하는 것처럼 보이고 조금 더 지난 뒤엔 변하거나 퇴색되는 것처럼 보이지. 그러다 결국 의미가 사라져 버린단다. p.51
분명한 건, 엄마와 할멈이 사라졌다는 사실이었다. 할멈은 영혼과 육신이 모두, 엄마는 껍데기만 남은 채로, 이제 내가 아닌 누구도 두 사람의 인생을 기억하지 못할 거다. 그러므로 나는 살아남아야 했다. p.66
이 구절에서 눈물이 나왔고 멈출 수가 없었다. 내가 아닌 누구도 두 사람의 인생을 기억하지 못할거다. 그러므로 나는 살아남아야 했다... 내 인생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므로 내가 살아남아야 한다.
책상 구석에 세워 둔 작은 액자 속의 우리 셋은 변함이 없었다. 웃고 있는 모녀와 표정 없는 나. 이따금씩 엄마와 할멈이 여행을 간 건 아닐까 하는 헛된 공상을 하곤 했다. 물론 결코 끝날 수 없는 여행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내 세계의 전부였다. 하지만 할멈과 엄마의 부재로 알게 된 건 세상에 다른 사람도 존재한다는 거였다. 한 명씩 천천히, 다른 사람들이 내 인생에 등장한다. p.81
안전하고 익숙한 공간. 우리. 세상에 하나 밖에 존재할 수 없으나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더 안전하고 재미있는 곳은 없다. 그래서 자꾸 돌아가고 싶고 그 속에만 있고 싶지만... 나가고도 싶었다. 윤재는 자신의 세계가 꺠어지면서 더 자라게 된다. 세상에 존재하던 다른 사람들이 윤재의 세계로 들어오고 그의 세계를 키운다. 나의 세계가 커지면서 우리의 세계에 쏙 들어갈 수는 없지만 끊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구할 수 없는 인간이란 없다. 구하려는 노력을 그만두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그는 무슨 의미로 그렇게 썼을까, 도와 달라는 손짓이었을까, 아니면 깊은 원망이었을까, ... 나는 세상을 조금 더 이해하고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내겐 곤이가 필요했다. p.128
interaction
관계는 쌍방향이다. 도와 달라는 손짓과 구하려는 노력이 같이 있어야 한다. 윤재의 한 걸음과 곤이의 한 걸음이 같이 이루어진 순간이 연의 시작이다. 둘의 세계는 이미 같은 궤도에 오른것이다.
- 친해진다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거죠?
- 예를 들어, 이렇게 너와 내가 마주 앉아 얘기하는 것. 같이 무언가를 먹기도 하고 생각을 나누는 것. 특별히 돈이 오가지 않는데도 서로를 위해 시간을 쓰는 것. 이런 게 친한 거란다. p.129-130
내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망설임으로 입을 열고, 후련함으로 입을 닫게 되는 것.
너로 인해 발화하게 되는 것.
학교에서 곤이와 나는 서로 모른 척했다. 말을 섞지도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우리는 칠판지우개나 분필처럼 그저 학교를 구성하는 존재일 뿐이었다. 거기서는 누구도 진짜가 아니었다. p.139
사람들은 계절의 여왕이 5월이라고 말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어려운 건 겨울이 봄으로 바뀌는 거다. 언 땅이 녹고 움이 트고 죽어 있는 가지마다 총천연색 꽃이 피어나는 것. 힘겨운 건 그런거다. 여름은 그저 봄의 동력을 받아 앞으로 몇 걸음 옮기기만 하면 온다. 그래서 나는 5월이 한 해 중 가장 나태한 달이라고 생각했다. 한 것에 비해 너무 값지다고 평가받는 달. p.152
- 글쎄요. 남들은 다 본 영화를 나만 못 보고 있는 거랑 비슷한 것 같아서요. 못 보고 살아도 상관없지만 본다면 다른 사람들과 얘기 나눌 거리가 조금쯤은 많이지겠죠. p.161
- 너랑 나, 누가 더 불행한 걸까. 엄마가 있다가 없어지는 거랑, 애초에 기억에도 없던 엄마가 갑자기 나타나서 죽어 버리는 것 중에서. p.168
어딘가를 글을 때 엄마가 내 손을 꽉 잡았던 걸 기억한다. 엄마는 절대로 내 손을 놓지 않았다. 가끔은 아파서 내가 슬며시 힘을 뺄 때면 엄마는 눈을 흘기며 얼른 꽉 잡으라고 했다. 우린 가족이니까 손을 잡고 걸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반대쪽 손은 할멈에게 쥐여 있었다. 나는 누구에게서도 버려진 적이 없다. 내 머리는 형편없었지만 내 영혼마저 타락하지 않은 건 양쪽에서 내 손을 맞잡은 두 손의 온기 덕이었다. p.171-172
사랑이라는 말이 저렇게 흔하게 쓰여도 되는 걸까...그러니까 내가 이해하는 한 사랑이라는 건, 어떤 극한의 개념이었다. 규정할 수 없는 무언가를 간신히 단어 안에 가둬 놓은 것. 그런데 그 단어가 너무 자주 쓰이고 있었다. 그저 기분이 좀 좋다거나 고맙다는 뜻으로 아무렇지 않게들 사랑을 입 밖에 냈다. p.175-176
너무 좋았던 날이 있다. 하나부터 열까지 안 좋은 것이 없던 날. 속에서만 돌던 사랑한다는 말이 지맘대로 튀어나왔다.
그 말이 내 귀에 들리자 바로 후회했다.
곤이에 대해 알게 되면 할멈과 엄마에게 일어난 일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고. 그렇게 해서라도 세상의 비밀을 한 가지쯤 알고 싶었다고.
- 그래서 알게 됐어?
고개를 저었다.
- 그 대신 다른 걸 얻었어.
- 뭔데
- 곤이. p.228
멀면 먼 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외면하고, 가까우면 가까운 대로 공포와 두려움이 너무 크다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껴도 행동하지 않았고 공감한다면서 쉽게 잊었다.
내가 이해하는 한, 그건 진짜가 아니었다.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았다. p.245
엄마... 엄마와 할멈... 심박사, 이수, 도라와 엄마
윤재의 세계는 넓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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