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려주고픈

밝은 밤

쫌~ 2022. 6. 29. 15:58

잘라도 될까 망설이던 다육이 꽃대를 자르던 날. 기억하고 있음을 남겨둘 마음이 생겼다.

언쟁(?)이 있었던 책이라서 별로 남겨두고 싶지 않았지만 ... 이것조차 기억해두고 싶은 마음에 남겨본다.
지금도 그 친구의 분노 포인트에 대해서는 그만큼 분노하지 않는다. 다만 왜 그 부분에 그렇게 언짢아했었는지에 대해서 궁금하다. 그 당시에는 내 관점은 다르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더 중요했었다. 그 관점에 동의하지 않았는데도 난 지금까지 이 책을 그 부분 때문에 곱지 않은 시선으로 기억하고 있다.
삼천이와 새비의 이야기는 삼천이의 딸 영옥이와 새비의 딸 희자의 이야기로...명숙 할머니와의 이야기로... 딸의 딸인 지연이와 정연이의 이야기로... 넓어진다. 이 이야기는 이별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나는 희령을 여름 냄새로 기억한다. p.9

첫 문장이 마음에 들었다. 냄새로 기억하는 순간들이 있다. 그 짧은 순간을 오래도록 남겨두기 위해서 나의 감각들이 얼마나 애를 쓴것인지...

나는 할머니에게 마음을 열었다. 아이들은 귀신같이 아니까. 이 사람이 자신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자신을 해치려 하는지 돌보려 하는지.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할머니와 헤어지면서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울었다. 할머니와 정이 들어서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앞으로 할머니를 못 볼지도 모른다는 예감 때문이었다. p.10
마음의 보호대 같은 것이 부러진 기분이었다. 덜 느낄 수 있도록 고안된 장치가 사라진 것 같았다. p.12

정말 기가막힌 표현이다. 아마도 아픔이겠지? 덜 느낄 수 있는 장치가 마음을 보호하는 것이라니... 무뎌지고 싶다고 이야기하는데 문득 무뎌지는 것이 좋은 것일까? 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 더이상 그런 관계가 가능하리라는 믿음이 들지 않았다. ... 여전히 어려운 밤을 보내면서도, 예전처럼 몸을 쥐어짜며 울지는 않는 내가 보였다. 두 시간, 세 시간을 이어 잘 수 있는 내가 보였다. 그렇지만 '나아지고 있는 걸까'라는 질문에 선뜻 그렇다고 답할 수가 없었다. p.15

몸을 쥐어짜며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 때의 나는 무엇에 마음을 얹었을까? 그 아픔과 슬픔인지 외면인지... 괜찮아졌느냐... 홀가분하냐는 질문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말은 듣는 순간 영원히 잊히지 않으리라는 걸 알게 한다. p.18

그런 말이 있었다. 신기하게도 그 비슷한 워딩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애써 기억해내려고 아무리 쥐어짜내도 명확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몇 시간 뒤에 기억해냈는데... 이제 더 이상 상처가 아닌걸까? 뭐가 달라진걸까?

" ... 그애를 열 살 때 마지막으로 보고 못봤어. 내 딸의 딸인데." p.20

말하고 싶지 않은 문장이지만 장담은 못하겠지.

만약 어린 시절에 할머니를 본 기억이 없었더라면, 그녀에게 부담스러움만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던 기억, 같이 웃던 기억은 서른둘이 된 내게 여전히 남아 있었다. p.23

기억이 여전히 남아있다면 ... 좋은걸까? 나쁜걸까?

"어떤 분이셨어요?" "누구? 우리 엄마?" ... "보고 싶은 사람이지 뭐." p.31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겠는가. 보고 싶다는데... 보고 싶은데 볼 수 없다는데...

무엇 하나 좋은 기억이 없던 집. 그 집을 떠나 기차역으로 가는데 그 짧은 길이 천릿길 같았고, 걸음걸음이 무거워 납으로 만든 신발을 신은 것 같았다. p.34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발목이 잡힌다는 것은 별로인가?

다시는 그렇게 같이 이야기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고, 그 생각만으로도 조금 슬퍼졌던 것이다. p.37
그저 슬프기만 했다. 그녀에게는 자신이 위협적인 사람일 뿐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p.39
할머니는 증조모가 그 나이의 자신을 버리지 못한 채 계속 붙들고 살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p.47
할머니는 증조모가 고조모에게 느낀 감정이 죄책감일 거라고만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시간을 지나면서, 고조모에 대한 증조모의 감정이 오로지 깊은 그리움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어리광 부리고 싶고, 안기고 싶고, 투정 부리고 싶고, 실컷 사랑받고 싶고, 엄마, 엄마, 하고 부르고 싶은 마음을 차곡차곡 접어둔 채로 살아왔을 뿐이라고.p.47

엄마와 딸의 관계는 부모와 자식이라는 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다.
...그래, 사람들은 그렇게 말한다. p.55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속이지 않는 재능. 부당한 일은 부당한 일로, 슬픈 일은 슬픈 일로, 외로운 마음은 외로운 마음으로 느끼는 재능. p.55

지금 나는 저렇게 말하고 싶다. ...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다. 나는 나를 속일 수 있는 재능이 있으니...

남편은 나의 고통에 관심이 없어. ... 허영심의 힘이 얼마나 센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p.60
너를 구하기 위해 내 인생을 희생하겠다는 마음이었다. 그 결과로 그는 평생을 억울함과 울화와 죄책감을 안고 살아야 했다. ... 아니, 그는 평생을 몰랐다. ... 그건 그저 충동일 뿐이었다. 떠나고 싶은 충동. 그는 그가 누릴 수 있는 인생을 그녀가 가 빼앗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p.61

자기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여 치뤄야했던 값... 누군가를 평생 외로움 속에 살게하였고, 자신의 딸도... 그 딸의 딸도... 무엇보다 자기 자신도... 지는 지 인생이니까... 그렇다하지만 아니 그래 백 번 양보해서 삼천이도 지 선택이니 (선택지도 없었는데 선택이라고 말하려니..) 그렇지만 영옥이는... 미선이는... 왜... 무엇때문에... 나쁜 새끼. 나도 있다. 잘 모르는 내가. 그것 때문에 누군가를 고통스럽게 만들수도 있을것이고... 내가 나를 지옥으로 던져넣고는 누군가를 평생 원망할수도 있겠지...그렇다고 저 새끼를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홀로 쓸쓸하게 죽었다고 해서 그의 삶도 힘들었을것이라고 가늠해주고 싶지 않다.

언제 거부당할지 모르는 채 그때를 기다리는 건 지겹고 비참한 일이었다. p.63
증조모의 마음이 새비 아주머니에게로 기울어서, 그곳으로 기쁨도 슬픔도 안타까움도 모두 흘러갈 듯한 기분을 느꼈던 것이다. ... 잘 알지 못했던 그때부터도 새비 아주머니를 잃을까봐 덜컥 겁이 났다.p.64

기운 마음으로 뒤뚱거리며 살고있다.

... 반복하는 사이 한 달이 훌쩍 지나서 초여름이 됐다. ... 많은 일이 일어났고 그것들을 소화하느라 지쳤지만, 놀랍게도 조금씩 회복되는 감각느낄 수 있었다. 책을 읽을 수 있었고 소논문도 하나 발표했다. p.89
아직도 내 마음의 일부는 그와 함께했던 시간을 그리워하고 있구나, 오로지 그만이 내게 줄 수 있었던 친밀함을 갈구하고 있구나, 그 편안함과 안락함을 기억하고 있구나. p.99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쉽게 홀랑 잊을 수 있...지. 별거 아니다. 그냥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하고 내 생활을 살아가면 된다. 가진 적 없었던 것처럼... 나는 운동을 한다. 목표도 없고 이유도 없지만 즐겁지 않고 힘들게 반복할 수 있는 일이어서 운동을 하고 있다.

아무 이유 없이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듯이, 어떤 이유 없이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나는 지우를 보며 알았다. p.102

지연. 끝까지 살아보길. 이유 없이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어디 있니. 이유 없이 싫어하는 사람을 납득하는 것이 더 쉬울까 까 구구절절한 이유로 나를 싫어하는 사람을 납득하는 것이 더 쉬울까.

-잊지 말구 살자. 영옥이, 아즈마이 잊을 기야? p.114
-아즈마이, 이제 가면 우리 언제 만나시까. 아즈마이 없이 사는기를 내는 모른다요. 아즈마이, 아즈마이. p.115
"새비 아주머니는 엄마의 상처였어. 그렇지만 자랑이기도 했지. 엄마를 크게 넘어뜨렸지만, 매번 털고 일어날 힘이 되어주기도 했으니까. 엄마가 새비 아주머니를 떠올리며 가장 많이 했던 얘기는 이거였어. 새비가 나를 얼마나 귀애해줬는지 몰라, 새비가 나를 얼마나 애지중지했는지 몰라. 새비 아주머니를 만나 아픈 일이 많았는데도, 새비 아주머니를 기억하는 엄마의 표정은 늘 환했어. 꼭 다른 세상에 있는 사람처럼 말이야. 새비 아주머니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런 상처 같은 거 받지 않아도 됐겠지만 그래도 엄마는..."
"새비 아주머니를 만나는 삶을 택하셨겠네요." p.116
...서럽다는 기 무슨 말이간. 슬프믄 슬프구 화가나믄 화가 나지, 서럽다는 기 뭐야. 나 기 말 싫구만. 너레 화가 나믄 화가 난다구 말을 하라요... p.127

상처가 나면 아프다. 시간이 지나 상처가 아물면 아프지 않다. 어떤 상처는 흉터를 남긴다. 어떤 흉터는 멋지지만 어떤 흉터는 가리고 싶다. 어떤 흉터는 날이 궂을때마다 또 다른 아픔을 주기도 한다.
삼천이와 새비는 서로에게 멋진 흉터였나보다.

엄마는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이야기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엄마의 모습이 낯설었지만 어쩐지 그 말이 듣기 좋았다. p.132
... 인생을 잡고 싶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p.133
엄마에게 그런 면이 있을 줄은 몰랐다고 말하니 엄마는 자기도 자기에게 이런 모습이 있는지 몰랐다고 답했다.p.133
예전처럼 며칠씩 서로 말도 붙이지 않을 정도로 신경전을 벌일 만한 일이 우리에게는 더이상 없었다. 큰불이 나기 전에 꺼버렸고, 상대에게 작은 불씨를 던졌다는 것에 문득 무안해지기도 하는 사이가 된 것이었다. 그건 우리가 그만큼 친밀한 사이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서로에게 큰 상처를 입혔다가 돌이킬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우리는 눈빛으로 공유하고 있었다. 우리는 더이상 끝까지 싸울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정말 끝이 날까봐 끝까지 싸울 수없는 사이가. p.137

정말 잘 기억이 안나서 정확한 워딩이 떠오르지 않아서 너무 답답하지만.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이 뭐가 중요한가. 그냥 나쁘다. 나빴다. 니가 나빴다.

"이런 이야기는 처음 해봐. 힘드니까, 그냥 기억이 잘 안 납니다. 하고 흘렸지. 기억이 안 나기는, 나이가 드니까 더 생생해지는 것 같아. 그런 일을 어떻게 잊어." p.142

시간이 더 지나면 다시 세세하게 기억 할 수 있을까? 고작 몇 달 전의 일인데 그것조차 기억이 안나고, 심지어 그 이전에 아끼고 아끼던 기억조차 아득하다. 실재인지 의심스럽기도 하다. 뭔 상관인가. 이렇게 갑자기 엮일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아프다는데...

어떤 성취로 증명되지 않는 나는 무가치한 쓰레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p.156
... 이게 숨구멍이라는 말. ... 나의 숨쉴 구멍이었던 존재가 일이 되고, 나의 가능성이 한계가 되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p.158

나의 소스케는 내가 정하는거니까. 어제는 니가 나의 소스케고 오늘은 그가 나의 소스케고 내일은 그 누군가가 나의 소스케지. 그때는 그랬지... 정말 세상 싫은 말이다.

그 작은 개의 존재가 짧은 시간에 나의 일상을 바꿔놓았다. p.208
귀리와 말이 통했다면 그애가 병원에 있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 텐데 그럴 수가 없어서, 그애가 창문도 없는 작은 방에 갇혀서 자신이 버려졌다고 생각할까봐 마음이 무거웠다. p.209
타인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이 내게는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을 돕는 것은 쉬웠다. 내가 돕기 어려운 일을 돕는 것도 할 만했다. 하지만 나를 도와달라고 손을 내미는 일은 내게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무리 힘들어도 다른 사람에게 징징대고 싶지 않았고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할머니에게 부탁하고 싶었다. p.212

누군가에게 징징거리고 부탁을 하는 것이 어려운 것은 매한가지다. 폐를 끼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그렇게 가까운 사람으로 나 혼자 생각하는 것이 싫다.

... 할마이는 언니에게 지나간 사람이라고. 지나간 사람이 언니 발목을 잡을 수 없다고. p.222
... 귀리의 죽음을 알렸을 때 느낀 감정이 슬픔만은 아니었음을 기억했다. 나는 안도했다. 나의 일부는 안도했다. 귀리의 고통이 이제 사라졌다는 사실에, 고통을 받는 그애의 모습을 보고 겪어야 했을 나의 괴로움이 끝났다는 사실에. 그 이기적인 마음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p.233
단정하고 온화해 보이는 희자의 글씨를 동경했던 할머니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희자와 비슷한 글씨체로 편지를 쓰고 있었다. p.247
... 사람의 노력을 알아보고 애쓴 마음을 도닥여주는 사람. ... p.257
-새비 너랑 있는 이 시간이 아깝다. 새비 아주머니는 한동안 아무 대답이 없었다.
-아깝다고 생각하면 마음 아프게 되지 않갔어. 기냥 충분하다고. 충분하다구 생각하구 살면 안 되갔어? 기냥 너랑 내가 서로 동무가 된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주면 안 되갔어? p.258
... 기게 새비야. 새비가 지 마음대로, 지 살고 싶은 대로 나머지를 산다는데 내레 뭐라고 .... 아무렇지 않은 척 대하는 게 새비가 바라는 기라면 내레 아무리 힘들어도 그럴 수 있었다. p.287
-... 모두 다 어쩔 수 없다. 어쩔 수 없다. 기렇게 마음먹으면서두 기래선 안 됐다는 걸 알고 있었다. p.293
별것 아닌 듯한 그 마음이 때로는 사람을 살게 한다는 생각을 했다. 어깨에 기대는 사람도, 어깨를 빌려주는 사람도, 구름 사이로 햇빛이 한 자락 내려오듯이 내게도 다시 그런 마음이 내려왔다는 생각을 했고, 안도했다. pp.299-300
무엇보다 힘이 센 시간이 할머니와의 기억을 빛바래게 했는지도 몰랐다. p.308
하지만 왜 분노의 방향은 늘 엄마를 향해 있었을까, 엄마가 그런 굴종을 선택하도록 만든 사람들에게로 왜 향하지 않았을까, 내가 엄마와 같은 환경에서 자라났다면, 나는 정말 엄마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p.314
... 진심이 아니라는 걸 알았어. 그렇지만 상처받았지. ... '엄마, 미안해요. 내가 나쁘게 말했어.' 그 말 한마디에 나는 그애를 용서했어. p.315
'내게 누군가가 있다'라는 마음의 속삭임을 엄마는 기억했다. p.329
내가 지금의 나이면서 세 살의 나이기도 하고, 열일곱 살의 나이기도 하다는 것도, 내게서 버려진 내가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사실도. 그애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관심을 바라면서, 누구도 아닌 나에게 위로받기를 원하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p.337

2022년 6월 마지막 주에 마음에 오래 남은 구절은... 봄이와의 이야기. 개로 표현했지만... 내게는 개가 아니다.

섬돌 위에 놓은 증조모의 신에 턱을 괴고 잠이 들었고, 증조모가 밖으로 나가면 겅중대면서 그 옆에서 뛰었다. 증조모는 귀찮다는 듯이 봄이를 옆으로 밀치면서도 결국에는 자리에 앉아서 봄이의 머리를 한참 동안 쓰다듬었다. 증조모가 집을 오래 비울 때면 봄이는 동구 밖까지 가서 기다리다가 돌아오는 증조모를 향해 달려갔다. '너는 내가 왜 좋아?' 의아한 표정으로 봄이의 등을 쓰다듬는 증조모의 얼굴에는 늘 작은 서글픔이 서렸다. 자기에게 달라붙는 봄이에게 그러지 말라고 투정하듯 말하는 증조모의 목소리는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누군가에게 그런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 증조모에게는 평범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p.113

반쯤 말린 숭어를 정신없이 먹는 봄이의 모습을 보며 할머니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짐을 다 꾸리고 집밖으로 나가자 봄이가 낑낑거리며 따라 나왔다. 평소 봄이는 꼬리를 치면서 따라오다가도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면 바로 알아듣고 돌아가던 아이였다. 하지만 그날은 할머니가 따라오지 말라고 아무리 얘기해도 신작로까지 쫓아왔다. 사람들이 자신을 떠난다는 것을 알아챈 듯이 낑낑대면서 돌아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증조모가 신작로 모퉁이에 쪼그리고 앉아서 봄이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봄이야. 우리 봄이야.
봄이가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서 증조모를 올려봤다.
-여기서 헤어지자. 이제 우리를 따라오지 말라는 말이야. 내레 미안해...
증조모의 말이 끝나자 봄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족들의 냄새를 한 번씩 맡더니 집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한참 멀어졌을 때야 한 번 뒤돌아봤을 뿐이었다. 할머니는 혹시나 봄이가 돌아올까봐 봄이의 이름도 부르지 못했다. 등을 돌린 채로 걸어가는 봄이를 보며 할머니는 목에 두른 목도리가 다 젖도록 소리 없이 울었다. 그후로 누구도 다시는 봄이를 언급하지 않았다. 봄이가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듯이. 그냥 개일 뿐이야. 할머니는 그렇게 생각하려 했지만
그런 거짓말로 스스로를 위로할 수는 없었다. pp.161-162

개한테도 저렇게 인사를 하는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가도 개도 저렇게 알아듣고 받아들이는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