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이상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어린 왕자 이야기가 떠올랐다. 왜일까?
아무튼, 사람들이 나를 괴롭게 할 때마다 나는 마음의 이빨로 진짜부모가 나를 '버렸다'는 생각을 꼭꼭 씹는다. p.13
기차는 오직 한 방향으로만 달린다. 하지만 버스는 앞뒤로 움직인다. 정말 집을 나가서 다시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라면 무겁고 긴 기차를 타야 한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을 까먹을 만큼 아주 멀리 가야 한다. 가볍고 짧고 후진을 잘하는 데다가 우리 집 앞을 지나가고 중간에 내릴 수도 있는 버스는 타나 마나다. 버스는 떠나려는 마음을 고무줄처럼 당겼다가 확 놓아버리고 만다. ... 돌아보지도 돌아오지도 멈추지도 않고 전혀 다른 방향으로 멀리, 아주 머얼리. pp.14-15
진짜 엄마와 가짜 엄마
마담이 아무리 그래봤자 나는 하나도 상처받지 않으니 상관없다. 그렇지만 나 때문에 장미언니가 상처 받는 건 싫었다. 나는 살면서 한 번도 고맙다는 말 같은 건 해본적이 없지만 마담이 너무 얄미웠기 때문에 꼭 마담이 듣고 있을때만 장미언니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가랑이 사이로 머리를 집어넣는 아주 격렬한 행동까지 곁들여서. 내가 그렇게 인사를 하면 해자언니는 웃겨 죽겠다는 듯 깔깔거렸고 마담은 눈초리를 천장 끝까지 추켜올렸으며 장미언니는 굉장히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쓸쓸한 게 뭔지 아느냐고? 모를 리 없지! 내가 엄마를 찢고 나오면서 제일 먼저 익힌 감정이 바로 그런 건데. p.42
백곰을 몇 번 안 본 나도 그걸 알겠는데, 언니는 왜 그걸 모를까? 그것도 사랑의 힘인가? 사랑은 다친 데를 치료해주는 연고 같은 건가? 정말 그런 거라면, 언니는 상처가 아닌 곳에 연고를 덕지덕지 바르고 있는 게 분명하다. 멀쩡한 곳에 자꾸 연고를 바르니까 진짜 상처는 점점 썩어 들어가고 멀쩡한 곳의 연고는 미끄덩 미끄덩, 언니와 백곰의 관계를 자꾸 엇나가게 하는 것이다. 근데, 그럼, 언니는 나를 사랑하나? 나를 사랑한다면, 언니는 나의 어떤 곳에 연고를 바르고 있나. 그곳은 다친 곳인가, 멀쩡한 곳인가. 나에게 멀쩡한 곳이 있긴 하나. 온몸에 연고 떡칠을 해도 나는 계속 아프고 썩어 들어갈 거다. 나도 언니를 사랑하는데, 나는 언니의 어느 곳에 연고를 바르고 있나. 언니는 어디에 상처가 났나. 근데 사랑은 정말 연고를 바르는 건가? 아, 모르겠다. 또 무지하게 복잡해진다. 하지만 언니가 백곰을 사랑하듯 나를 사랑한다면 그것만은 진짜 사양하겠다. 백곰을 먹이고 입히는 마음으로 나를 목욕시키고 예쁜 옷을 사 주는 것이라면, 나는 가짜엄마를 미워하는 것보다 언니를 더 미워할 것이다. 언니가 사 준 옷을 다 찢어버리고 단발머리도 빡빡 깎아버릴 것이다. 그리고 백곰이 언니를 무시하고 괴롭히는 것보다 더 강렬하게 언니를 저주할 것이다. 그건 나를 조롱하고 경멸하는 것보다 더 나쁜 거니까. 그건 나를 배신하는 거니까. pp.50-51
장미 언니.
사랑은 연고를 바르는 것이 아니라 생각한다. 아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할머니는 돌아서면 까먹고, 김치를 썰다가 까먹고, 국수를 건져내다가 또 까먹었다. 할머니는 머릿속에 국수와 전쟁과 이북과 집 나간 자식의 마지막 모습, 남해의 몽돌과 유채꽃과 영감의 목소리와 눈매를 고이고이 간직하느라 글씨를 넣을 틈이 없다고 했다. 글씨를 아무리 구겨 넣어도 다시 퉁퉁 튕겨 나온다고 했다. 나는 머리에 넣을게 없었기 때문에, 있어봤자 튕겨 나오면 더 좋을 것들만 갖고 있었기에 단번에 글씨를 다 집어넣을 수 있었나 보다. 나는 앞으로 내 머릿속에 넣을 것들을 생각해봤다. 진짜엄마를 집어넣고 진짜아빠를 집어넣고, 그다음은, 그다음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 상상은 정말 어렵다. 넣고 싶지 않은 것을 상상하는 건 아주 쉬운데. p.81
할머니의 웃는 모습, 할머니가 웃으니까 나도 웃음이 날 뻔했다. 그래도 꾹 참았다. 하지만 웃음은 눈물과 달리 참는다고 쉽게 참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나는 참고 참다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아주 조금 웃었다. 내가 웃는 걸 보고 할머니가 또 웃었다. 봄바람이 창문을 와르르 훑으며 지나갔다. p.84
할머니 앞에서 소리 내어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마구 샘솟기도 했다. 나는 아주 심각하게 고민했다. 할머니라면 책 읽는 나의 목소리를 아주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고, 그러면 할머니가 또 웃을 것 같고, 그럼 나도 참고 참다가 웃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은 진짜엄마를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따뜻하고 구체적이고 유쾌한 것이었다. p.85
나는 책 속의 단어들 중에 마음에 드는 것을 종이에 써서 식당 곳곳에 붙여놓았다. 할머니가 그 단어를 읽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그 단어에서 번져 나는 따뜻하거나 몰랑몰랑한 기운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컨대 '봉숭아'라든가 '초승달'이라든가 '난로''햇살''나비'같은 것들. 할머니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사랑한다거나, 최고라는 말도 하고 싶었다. 나는 달력 뒷장에 '고마워'라는 글씨를 써서 벽에 붙였다. 할머니는 그 글씨에서 '고'를 읽었다. 나는 그 글씨를 가리키고 허리를 싶게 숙였다. 할머니가 그 글씨를 이해할 때까지 몇 번이고 허리를 숙였다. 고맙다고? 할머니가 말했다. 그리고 '고마워'를 한 글자 한 글자 가리키며 '고맙다'라고 읽었다. 어쨌든, 나는 만족했다. 할머니가 자글자글 주름을 만들며 환하게 웃었다. 사랑한다는 말은 어떻게 표현하지? 오랫동안 그 문제로 고민을 했지만, 사랑한다는 걸 행동으로 어떻게 나타내야 하는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아서, 결국 할머니에게 사랑한다는 표현은 할 수 없었다. 아쉬운 대로 벽에 그 글자를 붙여두기만 했는데, 할머니는 가끔 그 글자를 멍하니 쳐다보면서 중얼거렸다. 맛있다. 밥 먹어. 잘 잤어. 할머니가 '사랑해'란 글자를 보며 상상하는 어떤 단어든, 결국은 다 사랑에 포함되는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사랑은 원래 그런 거니까. pp.86-87
할머니를 진짜엄마로 만들기 위해 내가 진짜 벙어리가 되자마자 봄은 사라짐고 여름이 왔다. p.93
나는 할머니를 끝까지 지켜주겠다고 생각했었다. 할머니를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하지만 할머니는 나를 버렸다. 제 아비가 죽을 때도 오지 않고, 10년 만에 나타나 돈을 내놓으라고 소리나 지르는 망나니 아들 때문에. 아들이 나보다 잘나서도 아니고, 나보다 똑똑하거나 착해서도 아니고, 오직 자기 속에서 나온 진짜자식이란 이유만으로. p.112
태백식당 할머니.
할머니 아들이 나타나기 전까지 좋았다. 이렇게 서로 의지하면서 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소녀를 사랑했지만 아들을 버릴 수 없으니 소녀를 버렸다. 버릴 수 있는 존재와 버릴 수 없는 존재. 뭐에 더 가치를 두고 있는지는 분명한 것 아닌가? 발걸음이 안떨어져도 버릴 수 있었으니... 쌍욕을 해도 버릴 수 없다면...
이제부턴 한곳에서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겠다. 너무 쉽게 진짜엄마라고 확신하지도 말고, 가짜의 낌새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바로 떠날 거다. 세상 사람을 하나하나 다 만나야 할지라도, 나는 기어이 진짜엄마를 찾아내고 말 테다. p.117
할머니도 곧 알게 될 것이다. 할머니가 경찰서에 갖다 버려야 했떤 건 내가 아니라 아들이었다는 걸. 할머니가 나를 끝까지 지켜주었다면, 나는 할머니 옆에서 죽을 때까지 살았을 것이다. 할머니가 먼저 죽으면 따라 죽을 수도 있었는데. 할머니는 단단히 실수한 거다. 이젠 아들이 할머니를 갖다 버릴 일만 남았다. 버려진 후에야 땅을 치고 후회해도 소용없다. 할머니는 가짜가 되었으니까, 나는 할머니를 절대 위로하지 않을 것이다. 떠올리지도 않을 것이다. pp.118-119
더 큰 문제는 주위 사람들이 그에게 그런 착함을 강요한다는 데 있었다. (그런 면에서 제일 나쁜 건 사람들이다. 자기들은 하기도 싫고 할 마음도 없는 착한 행동을 목소리에게만 강요하는 거니까.)목소리가 나를 보살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뒤로 사람들은 그를 더 많이 칭찬했다. 그래서 목소리는 나를 더 깨끗하게 입히고 얌전한 아이로 만들려고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좀 헷갈렸다. 목소리가 나를 보살피는 게 정말 나를 아껴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사람들이 보고 있기 때문인지, 혹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시켰기 때문인지. p.141
밖에서 언성을 높이는 사람들도 속으로는 전부 폐가를 필요로 한다는 걸. 이곳을 밀어버린 후 저들은 분명 또 다른 폐가를 만들어낼 것이다. 혹은 찾아낼 것이다. 그러면서 또 욕할 것이다. 밀어버려야 한다고. 없애버려야 한다. p.165
폐가의 남자.
목소리로와 폐가의 남자. 누가 진짜로 먹이고 보살핀 것일까?
대장이 불을 삼키지도, 벽돌을 깨지도 못한 이유는 목적을 잃었기 때문이다. 진짜든 가짜든 엄마를 찾아야 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을 때, 대장은 천하무적이었다. 불도 삼키고 돌도 깼다. 누가 시켰다면 철도 씹어 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미남이 이모와 싸우느라 대장은 자기가 뭘 하고 있었는지 까맣게 잊고 말았다. 그렇지만 나는 잊지 않았다. 나는 대장과 달리 언제나 진짜엄마를 찾아 헤맸다. 그러니까 이제는 내가 불을 샄킬 차례다. 내 안엔 아직 타오를 것이 많으니까. 내가 대장 대신 불을 삼키고, 대장처럼 빛날 것이다. 불을 아주 많이 샄겨서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활활 타오를 거다. 그래서 진짜엄마가 아무리 멀리 있더라도, 그래, 외국에서라도 빛나는 나를 보고 당장에라도 찾아올 수 있도록 말이다. p.201
나는 삼촌의 손을 탁 놓았다. 나는 안다. 본능적으로. 나를 버리려는 손과, 나를 지키려는 손의 차이를. 삼촌의 손은 너무나 차갑고 딱딱했다. 삼촌이 다시 내 손을 잡아끌었다. p.232
삼촌이 머뭇거리더니 나를 꼭 껴안았다. 그리고 주문처럼, 나쁜 사람만 만나지 말라고, 누구에게도 붙잡히지 말라고, 미안하다고, 정말 미안하다고 중얼거렸다. 삼촌과 나 사이에 끼인 까만 비닐봉지에서 서걱서럭, 마음 구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삼촌의 옷에 밴 담배 냄새와 땀 냄새를 깊이 들이마시며 중얼거렸다.
걱정 마. 나는 아무에게도 붙잡히지 않아. 아무도 나를 붙잡지 않다. 왜냐면 아무도 나를 원하지 않으니까. p.234
각설이패.
버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은 내 생존을 위협하는 것인가? 내 생존이 위협당해도 버리지 않고 지키는 무엇이 있기는 할까?
하지만 진짜엄마를 찾지 못했던 지난날, 나는 행복한 적 있다. 할머니와 함께 있을 때도 행복했고, 폐가의 남자와 지낼 때도, 대장과 달수 삼촌이랑 같이 있을 때도 행복했다. 장미언니와 목욕을 할 때도 그랬다. 진짜엄마를 찾아야 한다는 사실이 오히려 나를 불행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니까 각자 모른 채 살면 행복할 수도 있는데, 만나서 불행해질 수도 있다. 그래도 나는 진짜엄마를 찾아야 하나? p.245
남자가 끓인 라면을 후후 불어가며 정신없이 먹다 보니, 그런 날이 오지 말란 법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배가 부르면 생각도 넉넉해진다.) 그리고 오지 않으면 또 어떠냐는 생각도 들었다. 까짓것, 그만이다. 죽기 전까지 찾지 못하면, 죽어서라도 찾으면 된다. 달수 삼촌은 그런 말도 했다. 엄마를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찾기까지 어떻게 사느냐도 중요하다고. 열심히 잘 살다 보면, 애써 찾지 않아도 저절로 내게 올 것이라고. 달수 삼촌이 그런 말을 하면 대장은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고 코웃음을 쳤다. 코웃음을 치면서 쓸쓸한 눈으로 담배를 피웠다.
어차피 모든 건 선택의 문제다.
나에게도 포기할 것이 남아 있다면 말이다. p.253
진짜엄마라고 해서 특별할 거라는 생각은 진즉에 버렸다. 진짜엄마 역시 내가 형편없는 몰골을 하고 있으면 나를 멀리할 게 분명하다. 진짜엄마를 만나면 뭐가 좋을까에 대해서도 생각해봤다. 매일 뜨신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 (장담할 수 없다.) 춥지 않게 잘 수 있다는 것? (이 역시 장담할 수 없다.) 나에게 가족이 생긴다는 것? (가족이 대체 뭐지.)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 (행복은 반드시 불행과 함께 온다.) 사랑받을 수 잆다는 것? (과연 그럴까.) 버려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 (이 또한 장담할 수 없다.) 진짜엄마란 대체 뭐지? 나는 왜 그것을 찾지? 거리를 헤매며 많은 사람들을 보면 볼수록, 나는 그 이유를 서서히 잃어갔다. 알맹이 없는 목적을 품고 걷는 길은 고되고 무의미했지만, 나는 끝없이 걸었다. 누군가가 너는 왜 이거리를 떠돌고 이쓴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저 지금까지 걸어왔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내게 그런 질문을 하진 않았다. pp. 257-258
그 시절로 돌아갈 순 없다.
그 시절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시절로도 돌아갈 수 없다. 삼촌과 대장도 그것을 잘 알 것이다. 가끔 기억은 하겠지. 그리워도 할 거야. 내 안부를 궁금해할지도 몰라. 하지만 기다리진 않을 거야. 지난 일이라 말하면서, 아주 가끔 들춰보는 앨범 속 사진처럼 지난날을 포장하겠지.
유미가 화장실에 간 사이 상호에게 슬쩍 물었다. 왜 오토바이를 타느냐고. 상호는 별 이유 없다고 했다. 늘 하던 것이니까. 안 하면 왠지 허전해서. 섹스 같은 거지. 그 말을 하면서 상호는 나를 흘금 봤다. 나는 상호의 말을 이해했다. 늘 하던 것처럼 나는 진짜엄마를 찾지. 안 하면 왠지 허전하니까.
이유 같은 건 없다.
있었지만, 잊었다. p.268
유미와 나리.
이전까지 (장미언니, 할머니, 폐가의 남자, 대장과 달수 삼촌) 관계들과는 다른 것 처럼 느껴졌는데. 왜 내 목숨을 걸고 칼을 들었을까? 고마움도 사랑도 읽을 수 없었는데...
중요하지 않은 것부터 버리는 것이다.
지나가버린 중요한 것은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지금의 중요한 것들로 채우고, 채우기 위해서 버리고, 어차피 채우고 버리고 채우고 반복할 것인데... 굳이 뭐하러 찾아서 채우나. 버리고 다시 채워야하는 것을
나는 가짜다.
활활 잘 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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