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려주고픈

사람에게는 사람이 필요하다.

쫌~ 2022. 4. 21. 10:26

첫 장에서 엄마가 떠나는 것을 들려준다. 곧이어 조디가 떠난다. 막둥이 카야만 남겨두고 다들 떠난다. 그나마 조디는 이런 저런 당부의 말을 남기고 자신이 떠난다는 이야기라도 해준다. 그렇다고 슬픔이 덜하지는 않지만... 그렇기에 기억한다. 엄마를 그리워하는 카야를 위로하며 선장을 시켜주었던 오빠의 이름. 조디.
여전히 폭력적이며 이제 일곱살이 된 막내 딸의 양육도 내팽겨치는 아빠로부터 살아남는(?) 법을 스스로 터득해가는 카야는 습지의 포근함 속에서 보호받음을 느끼며 하루 하루를 보낸다.
무슨 사고처럼 등장한 빨간 야구 모자의 테이트. 테이트의 등장 이후 읽는 내 마음이 한결 놓였다. 테이트가 건넨 인사와 행동이 카야에게는 타인의 선의를 처음 경험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 경험으로 카야는 피하고 숨기만 하던 아빠에게 다가가는 용기를 내고, 아빠로부터 처음으로 무언가를 받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엄마로부터 편지가 도착했던 그 날 이후로 다시 이전으로 돌아간다. 심지어 엄마의 편지 내용도 알 수 없었고, 다 타버려서 엄마가 있는 곳도 알 수 없었다.

따스했던 날들은 덤으로 주어진 계절이었다. 낮은 구름이 갈라져 밝은 햇살이 카야의 세상을 잠시 환하게 비추는가 싶더니 곧 어둠이 굳게 아물려 움켜쥔 주먹처럼 단단하게 죄어들었다. p.93

카야가 열살이 되었을 무렵부터 아버지는 집에 돌아오는 횟수가 더 뜸해졌다. 심지어 생활비도 음식도 기름도 이제 더 남아있지 않게 되었을 때, 카야는 점핑 아저씨의 선의를 경험하게 된다.

솔직히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려면 애를 써야 했다. 그래도 이제 진짜 외톨이라는 느낌은 막막하다 못해 윙윙 메아리쳤다. 정부에서 알게 되면 데리러 올 텐데. 아버지가 아직도 있는 척, 점핑한테마저 거짓말을 해야 했다. p.97

"아니, 갈매기랑 왜가리랑 판잣집을 떠날 수는 없어. 나한테 가족은 습지뿐인걸." p.98

점핑 아저씨와 메이블 아줌마 그리고, 테이트함께하는 카야의 삶. 백인전용 교회만도 4개나 되는 마을인데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백인)사람들의 카야를 대하는 태도는 실망스러우며 (선교사 나부랭이-정말 나부랭이라고 쓰고 싶음-들의 태도는 더 가관), 카야의 집까지 몰려와서 행패부리는 어린 양아치 개새끼들... 모든 것이 두렵고 무섭지만 카야에게 선의를 갖고 도움을 주는 사람들과 습지에 기대에 살아간다.

하지만 카야는 꼼짝도 하지 않고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소년에게서 강렬한 이끌림과 강렬한 밀어냄이 동시에 느껴지는 바람에 그냥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조용히 노를 저어 집으로 돌아갔다. 심장이 갈비뼈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소년을 볼 때마다 그랬다. 왜가리들 바라보듯 보기만 했다. p.102

"맙소사. 우리가 뭐라도 좀 해줘야겠어요. 누가 이런 생선을 사가겠어요. 나야 스튜에 넣어서 요리라도 하겠지만. 우리 교회에서 아이 옷가지하고 또 다른 물건들을 좀 구할 수 있을 거예요. 잉어 몇 마리 잡아오면 스웨터로 바꿔줄 집도 몇 집 있고요. 그 애 옷 사이즈가 어떻게 돼요?" p.106

삶에는 재미가 필요하다. 생존이 무엇보다 중요했지만 카야는 본능적으로 살아가는 즐거움을 찾았다. 습지와 숲에서 각종 깃털들을 주워모았다. 이제 테이트를 통해 삶의 즐거움을 수집하게 된다.
(완전 쓸데없는 생각의 가지인데... 이렇게 꽂히네. 친구들 다 쓸모없다. 세상과 연결이 되어주고, 자신 안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용기가 되어주고, 여러 가지 감정을 끌어내어주고, 아름다움이 뭔지 알게해주고, 문명으로 이끌어주는 그 한 사람 있으면 된거지...)

그날 밤 깍지 낀 손에 머리를 괴고 잠자리에 누운 카야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가족들은 늪에서 혼자 알아서 살도록 그녀를 버리고 떠났지만, 누군가가 찾아와 그녀를 위해 숲속에 선물을 두고 간다. 불확실성이 사라진 건 아니더라도 소년이 나쁜 마음을 먹은 것 같지는 않았다. 새를 좋아하는 사람이 심성이 못됐을 리가 없다. p.121

"다들 엄마 말 잘 들어. 이건 진짜 인생에 있어 중요한 교훈이야. 그래, 우리 배는 좌초돼서 꼼짝도 못 했어. 하지만 우리  여자들이 어떻게 했지? 재밋거리로 만들었잖아. 깔깔 웃으며 좋아했잖아. 자매랑 여자 친구들은 그래서 좋은 거야. 아무리 진흙탕이라도 함께 꼭 붙어 있어야 하는 거야, 특히나 진창에서는 같이 구르는거야." p.122

"엄마, 지금 어디 있어? 왜 우리하고 꼭 붙어 있어 주지 않았어?" p.123

"있잖아, 내가 글 읽는 거 가르쳐줄 수 있어." p.126

책 읽기를 가르쳐주겠다던 테이트는 며칠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깃털 놀이 이전에 외로움은 당연히 몸에 항상 붙어 있는 팔다리 같은 것이었지만 이제는 외로움이 카야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고 가슴을 짓눌렀다. p.127

사람이 그리워서, 여자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충동적으로 한 방문이었다. 점핑이 아직 집에 안 왔대도 메이블과 마주 앉아 잠깐 쉴 수 있을 것이다. p.128

"단어가 이렇게 많은 의미를 품을 수 있는지 몰랐어. 문장이 이렇게 충만한 건지 몰랐어." 테이트는 미소를 지었다. "아주 좋은 문장이라서 그래. 모든 단어가 그렇게 많은 의미를 품고 있는 건 아니거든." p.131

"무슨 말이야.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란? 엄마도 그런 말을 했었어." 엄마는 언제나 습지를 탐험해보라고 독려하며 말했다. "갈 수 있는 한 멀리까지 가봐. 저 멀리 가재가 노래하는 곳까지." "그냥 저 숲속 깊은 곳, 야생동물이 야생동물답게 살고 있는 곳을 말하는 거야. 그런데 어디서 만날지 생각해봤어?" p.140

엄마이고 아빠였다. 테이트와 점핑, 메이블. 카야의 존재가 세상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고, 카야의 순간에 함께해주었다.  (그렇게 싫어할 수가 있을까? 언제라도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위협이 되는 사람이니... 싫은 것이 아니라 두려운건가? )

"나는 걱정하지 마. 어서 가." 테이트는 일어서서 카야 쪽을 보지 않고 보트로 갔다. 모터에 시동을 걸고 해변에서 멀찌감치 떨어져서 카야가 연안을 따라 집으로 이어지는 물길로 들어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한참 뒤처져 한 점 얼룩처럼 보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테이트는 카야가 호소에 닿을 때까지 뒤를 따랐다. p.150

"그 보트에서 나올래요, 아니면 내가 그리로 들어갈까요?" ... "자, 이제 뭐가 문제인지 말을 해봐요." 두 사람은 허리를 굽혀 고개를 맞댔고, 카야는 속살거리며 말했다. 그러자 메이블이 카야를 끌어당겨 풍만한 가슴으로 꼭 안고 아기처럼 어르며 흔들어주었다. 카야는 포옹을 받을 줄 몰라 몸이 빳빳이 굳었지만 메이블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결국 카야도 힘을 빼고 포근한 베개 같은 품에 폭 안겼다. 한참 후에 메이블은 물러나서 갈색 종이봉투를 열었다. ... "자, 미스 카야. 부끄러워할 거 하나도 없어요. 저주 어쩌고 하지만 말도 안 돼요. 이건 모든 생명의 시작이에요. 그리고 여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에요. 이제 여자가 된 거예요, 꼬마 아가씨." pp.151-152

카야는 다음 날 오후 테이트의 배 소리를 듣고 빽빽한 수풀 속에 숨었다. 세상에 그녀를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도 이상한데, 이제 테이트는 카야 인생에서 가장 은밀하고 사적인 사건마저 알게 되었다. 생각만 해도 뺨이 화끈 달아올랐다. 카야는 테이트가 갈 때까지 숨어 있으려 했다. ... "파커 빵집에서 꼬마 케이크를 사왔어." p.152

서로에게 무언가가 되어간다. 테이트와 카야가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상호작용 할 수 있는 관계였고, 무리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중 저런 관계를 갖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테이트가 하지 않은 다른 말은 잃어버린 누이에 대한 다정한 마음과 소녀를 향한 불타는 사랑 사이에서 뒤엉켜 있었다. 자기도 도저히 정리할 수 없는 마음이었지만 이보다 더 거센 파도에 휩쓸려본 적은 없었다. 쾌감만큼이나 고통스러운 이 감정들의 강력한 힘이란. p.154

평생 처음으로 카야의 심장이 한 점 모자람 없이 가득 차올랐다. p.157

엄마가 떠난 후로 생일을 축하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카야의 이름이 쓰인 케이크를 가게에서 사다준 적이 없었다. p.159

카야는 생물학의 세계를 샅샅이 뒤지며 어미가 새끼를 떠나는 이유에 답이 될 만한 설명을 찾아 헤맸다. p.165

죽음이 필연적이듯 이별도 그런 듯. 이별 후에 더 자라게 되는 것 개나줘라!!!! 점핑도 메이블도 다 등져버리네. 테이트만 있으면 된거네. 테이트가 있어야 점핑도 메이블도 의미가 있는거냐? 테이트도 아니지. 사랑(?)인가? 테이트가 아니어도 되지만 그것이(아 이게 뭘까?) 있는 사람이 있어야만 하네. 카야는 그런 종류이다. 연대가 가치 있는 사람이 아닌데 친구가 뭔 의미가 있겠어. 

카야를 떠난 모든 사람 중에 작별인사를 건넨 건 조디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가버리고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해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카야는 가슴이 쓰라리게 아파왔다. p.170

"카야, 매번 이런 식으로 도망치기만 할 수는 없어. 가끔은 같이 의논해야 한단 말이야. 현실을 직면해야지." p.171

카야는 힘없이 자기가 무슨 짓을 했기에 모두가 떠나버리는 걸까 생각했다. 친엄마, 언니들, 온 가족, 조디 그리고 이제 테이트까지. 카아에게 가장 아린 기억은 오솔길을 따라 하나씩 사라지는 가족들이었다. 하얀 스카프 끝자락이 잎사귀 사이로 나릴고, 바닥 매트리스에 남아 있던 양말 더미. 테이트와 삶과 사랑은 같은 말이었다. 그런데 이제 테이트가 없다.
"왜, 테이트, 어째서?" 카야는 이불에 얼굴을 묻고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과는 다를 거라고 했잖아. 곁에 있어줄 거라고 했잖아. 나를 사랑한다고 했잖아. 하지만 사랑 같은 건 없어. 이 세상에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어." 어딘가 마음속 아주 깊은 데서, 앞으로는 아무도, 믿지도, 사랑하지도 않겠다는 결심이 단단하게 뭉쳤다. pp.181-182 

볼일만 보고는 물끄러미 서서 바라보는 점핑을 등지고 떠났다. 다른 사람들한테 상처를 주고 싶었다. p.183

외로움은 점점 커져 카야가 품을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카야는 누군가 다른 사람의 목소리, 존재, 손길을 바랐지만, 제 심장을 지키는 일이 우선이었다. p.184

"카야에게도 여자 친구들이 필요해요. 영원히 지속되거든. 서약도 필요 없고, 여자들끼리 꼭꼭 뭉쳐 다니면 거기가 이 땅에서 제일 따뜻하고 제일 터프한 곳이지요." p.188

카야는 바닷가에서 그들을 좇았다. 아니 주로 체이스를 좇았다. 카야의 마음은 다른 곳을 향해 있었지만 욕망이 이끌리는 방향은 달랐다. 카야의 심장이 아니라 몸이 체이스 앤드루스를 주시했다. ... 하지만 외로움을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그래서 카야는 그다음 날에도 그 바닷가로 돌아가 체이스를 찾았다. 그리고 또 그다음 날도. p.189

체이스가 바닷가에서 카야를 슬쩍 쳐다본 후로 카야는 벌써 일주일에 두 번씩이나 점핑의 가게를 찾았다. 거기서 체이스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걸 스스로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누군가가 그녀를 눈여겨보았다는 사실 자체가 사회성의 도화선에 불을 댕겼다. 그래서 카야는 점핑에게 물었다. "메이블 아주머니는 어떠세요? 잘 지내고 계세요? 손자들은 집에 있고요?" p.191

테이트는 더 좋은 걸 발견하자마자 미련 없이 떠나버렸다. 심지어 작별인사를 하러 오지도 않았다. p.193

아무도 체이스와 같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지 않았다. 심지어 테이트마저도. p.198

카야는 잠시 망설였다. 누군가를 만진다는 건 자신의 일부를 내어준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다시는 되찾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그런데도 카야는 체이스의 손바닥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p.198

하지만 어떻게 해도 불타는 수치심과 날카로운 슬픔이 멎지 않았다.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다는 소박한 희망, 누군가가 자신을 진심으로 원하고, 어루만져주고, 끌어당겨 품어주면 좋겠다는 소망, 하지만 이렇게 다급하게 더듬는 손길은 나눔도 베풂도 아닌 그저 포획일 뿐이다. pp.203-204

카야는 카야의 행동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 행동에 대한 의미도 카야가 부여할 수 있다. 같은 사람은 없다. 열 명의 사람이 있다면 열 개의 종족이 있는 것이다. 서로 같은 종족이거나 최소한 비슷한 종족이어야 하는가? 자신의 한 조각을 포기하면서까지 곁에 둘 가치 있는 사람은 없다.(시간이 흐를수록 명확해지네.)

말도 안 되는 갈망인 줄 알고 있었다. 비논리적 행위로 공허를 채우려 해봤자 좋은 결과가 나올 리가 없다. 고독을 좇는 대가로 얼마나 큰 값을 치러야 할까? p.205

이곳을 찾아온 사람은 테이트 이후 체이스가 처음이었다. 테이트는 습지의 다른 생물들과 마찬가지로 자연스러웠고, 이곳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체이스와 함께 있으면 무방비로 노출된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가 생선처럼 살을 발라내려는 양 적나라한 수치심이 일렁이며 차올랐다. p.211

... 카야의 마르지 않는 지식이 흥미로웠다. 그러나 사슴 곁을 지날 때는 소리를 내지 않고 저속으로 표류한다거나 새 둥지 근처에서 목소리를 낮춰 속삭이는 카야의 배려에는 코웃음을 쳤다. 조개껍데기나 깃털에 대해서도 배우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카야가 일기장에 메모하거나 표본을 채집하면 꼭 따져 물었다. ... 카야는 체이스를 생각해서 웃어주었다. 살면서 해본 적 없는 일인데도 곁에 누군가를 두기 위해 자신의 한 조각을 포기했다. p.221

DNA, 동위원소, 원생동물 바로 다음에 테이트가 배운 건 카야가 없이는 숨 쉴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카야는 대학 세계에서 살 수 없지만 이제는 그가 카야의 세상에서 살 수 있었다. p.224

타인의 기척을 기다리지 않는 건 해방이었다. 그리고 힘이었다. p.226

"무가치한 남자들이 시끄러운 법이거든." 엄마는 말했다. 카야는 암컷에게 한 가지 위로가 되는 부분도 읽었다. 안하무인의 자연은 부정직한 신호를 발산하거나 이 암컷 저 암컷 전전하는 수컷들은 예외 없이 외톨이가 되게 만들고야 만다. p.228

그리고 생각했다. '우주의 다른 모든 사물처럼 우리도 질량이 더 높은쪽으로 굴러가기 마련이지.' p.232

시간이 걸렸지만 아니 시간이 필요했었던 것인가? 돌고 돌아도 결국 만나야하는 사람들은 만난다. 서로의 필요가 끌어당기는거지. 각자 있어야 할 곳에 있어주어 결국은 자신 생의 몫을 해낸다. 세상에 보여주게 된다. 카야 자신의 이름으로. 그 일로 카야는 영영 잃은 줄 알았던 조디(하지만 한 번도 조디와 떨어진 적이 없었다. 카야가 습지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해주고, 결국 그 경험이 카야에게 조디를 불러오게 된다)를 다시 만나게 된다. 카야가 이룬 것이지만 테이트와 함께 한 것이다. 물론 점핑 아저씨와 메이블 아줌마를 빼놓을 수는 없지... 그리고 작은 선의를 가진 사람들... 그 선의를 직접 보여주는 사람들...

"아, 그러셔! 나를 두고 떠난 건 너잖아. 약속해놓고 돌아오지 않았잖아. 영영 돌아오지 않았잖아. 하다못해 이유도 말해주지 않고, 심지어 죽었는지 살았는지 일언반구 연락도 없었잖아. 나랑 헤어질 배짱도 없었던 주제에. 남자답게 내 얼굴 보고 말할 용기도 없었지. 그래서 그냥 사라졌잖아. 닭똥만도 못한 겁쟁이 새끼. 그 많은 세월 다 흘려보내고 이제 슬렁슬렁 여기에 얼굴을 디밀고...... 너는 그놈보다 더 나빠. 체이스가 완벽한 남자는 아닐지 모르지만, 너는 비교도 안 되게 나쁜 놈이야." p.245

카야는 바람이 막 빠져나간 돛처럼 축 늘어졌다. 테이트는 첫사랑 그 이상이었다. 카야처럼 습지를 헌신적으로 사랑했고, 카야에게 글을 가르쳐주었고, 아무리 희박한 인연이라도 사라진 가족과 이어주는 유일한 끈이었다. 테이트는 시간의 한 갈피였고 스크랩북에 붙인 사진이었다. p.246

이번에도 테이트는 자기가 돌봐주겠다고 말하지 않고, 카야가 자기 자신을 돌볼 수 있도록 격려해주고 있다. 카야의 삶에는 언제나 그가 있었다. 그러다가 사라져버렸다. "한번 해봐, 카야. 나쁠 게 뭐 있겠어?" p.249

카야는 체이스를 잃었기 때문에 슬픈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거절로 점철된 삶이 슬펐다. p.264

다른 시간 다른 장소였다면 늙은 흑인과 젊은 백인 여자는 포옹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장소, 그 시간에는 안 될 말이었다. 카야는 양손으로 점핑의 손을 꼭 감싸 쥐었다가 돌아서서 떠났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린 점핑의 모습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카야는 그 후로도 점핑의 가게에서 연료와 생필품을 샀지만 다시는 구호 물품을 받지 않았다. 점핑의 부두를 찾을 때마다 카야는 훤히 잘 보이는 창가에 자랑스럽게 자기 책이 놓여 있는 모습을 보았다. 아버지가 딸의 책을 자랑하듯이. p.275

"로즈메리 이모 말로는 엄마는 끝내 친구도 사귀지 않고 가족과 함께 식사도 하지 않고 그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았대. 자신에게 어떤 삶의 기쁨도 허락지 않았다는 거야. 한참이 지나자 말수가 좀 많아졌는데, 자식들 얘기밖에 하지 않았대. 로즈메리 이모가 그랬어. 엄마는 평생 우리를 사랑했지만, 돌아가면 우리가 다칠 거고 돌아가지 않으면 우리가 버림받은 채 살아갈 거라는 끔찍한 믿음에 갇혀 있었다고, 엄마는 혼자 재미를 보려고 우리를 버리고 떠난 게 아니라고, 광기에 내몰려서 자기가 떠났다는 사실조차 몰랐다고." p.292

어쩌면 원초적 충동이, 지금 시대와는 맞지 않는 태고의 유전자가, 아버지와 함께 사는 스트레스와 공포와 엄연한 위험에 반응해서 엄마가 우리를 두고 떠나게 내몰았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렇다고 옳은 일이 되는 건 아니야. 엄마는 의지로 남는 쪽을 선택했어야 한단 말이지. 하지만 이런 성향이 우리 생물학적 청사진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면 심지어 실패한 엄마도 용서하기가 조금은 쉬워져. 다만 이렇게 보면 엄마가 떠난 이유는 설명이 되지만, 돌아오지 않은 이유는 설명이 안 돼. 엄마는 왜 나한테 편지 한 통 쓰지 않은 걸까? 해마다 편지를 쓰고 또 쓰고, 그러다보면 결국 한 통이라도 내가 받았을 텐데." p.296

그런데 문단마다 테이트가 등장했다. 어렸을 때 습지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데 테이트가 구해준 일. 테이트가 처음 읽어준 시. 카야는 깃털 게임이며, 테이트가 글을 가르쳐준 얘기며, 지금 연구소에 과학자로 취직했다는 소식까지 오빠에게 얘기해주었다. 첫사랑이었다고 하지만 대학에 가면서 카야를 버렸고, 호소에서 혼자 기다리게 만들었다고 그래서 끝났다고. p.300

카야는 '소중한'과 '사랑'이라는 말을 다시 한번 읽었다. 테이트, 보트를 타고 폭풍우가 오기 전에 집으로 가는 길을 인도해준 황금빛 머리칼의 소년. 닳아빠진 등걸에 깃털 선물을 놓아두고 글을 가르쳐준 소년. 여자가 되는 첫 고비를 순조롭게 지나칠 수 있게 도와주고 처음으로 암컷의 욕정을 일깨워준 상냥한 마음씨의 십 대. 책을 펴낼 용기를 준 젊은 과학자. p.308

"테이트, 내 말 들어. 나는 오랫동안 사람들과 함께 살기를 갈망했어. 정말로 누군가 내 곁에 머물러줄 거라고, 실제로 친구와 가족을 갖게 될거라고 진심으로 믿었어. 집단 어딘가에 소속될 수 있다고 말이야. 하지만 아무도 내 곁에 머물러주지 않았어. 그쪽도 떠나버렸고, 우리 가족도 내 곁에 남지 않았지. 이제서야 그런 상황에 대처하고 나 자신을 보호하는 법을 알았단 말이야. 하지만 지금은 이런 얘기 못 하겠어. 여기로 나 보러 와준 건 고마운데, 정말 고마워. 언젠가 우리가 친구가 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그런 생각은 지금은 도저히 할 수가 없어. 여기서는 못 해." p.362

이 말을 하며 세라는 카야를 슬쩍 쳐다보았고, 까마득히 오래전 맨발로 장을 보러 오던 어린 소녀를 기억했다. 아무도 모르겠지만, 카야가 셈을 배우기 전에 세라는 꼬마에게 잔돈을 더 얹어주곤 했다. 그리고 자기 주머니에서 비는 돈을 채웠다. 물론 카야가 들고온 돈이 워낙 푼돈이라서 기껏 동전 몇 푼밖에 줄 수 없었지만, 그나마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p.402

로버트 포스터는 증인석에서 내려와 테이트, 스커퍼, 조디, 점핑, 메이블과 함께 카야 뒤에 앉았다. p.412

"... 하지만 사실 그녀는 그저 버림받은 아이였습니다. 유기되어 혼자 늪에서 배고픔과 추위와 싸우며 살아남은 어린 소녀를, 우리는 돕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하나뿐인 친구 점핑을 제외하면 우리 교회는 물론 지역사회 어떤 집단도 그녀에게 음식이나 옷가지를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우리는 그녀에게 늪지 쓰레기라는 딱지를 붙이고 거부했습니다. 우리와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 우리와 다르기 때문에 캐서린 클라크를 소외시켰던 거가요, 아니면 우리가 소외시켰기 때문에 그녀가 우리와 달라진 건가요? 우리가 일원으로 받아주었다면, 지금 그녀는 우리 중 한 사람이 되었을 겁니다. 그녀를 먹이고 입히고 사랑해주었다면, 우리 교회와 집에 초대했다면, 그녀를 향한 편견도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오늘날 범인으로 기소되어 이 자리에 있지도 않았을 겁니다...." p.421

책을 덮으며 가장 슬펐던 것은 어머니의 일이었다. 조디에게 어머니의 이야기를 전해 듣기 전까지 카야에게 부침이 있을때마다 나는 어머니를 탓했다. 카야의 아버지를 탓하지 않은 것이 정말 아이러니다. 어머니도 피해자였는데... 가해자인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고, 어머니를 탓하고 있었다. 카야가 습지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모든 순간에 함께 했던 것은 조디 뿐만이 아니라 엄마도 있었는데... 어머니가 아이들이 어머니를 의지했듯 아이들에게 의지하여 용기를 내보았다면 자책의 동굴로 들어가지 않고... 안타까움이 있었다. 엄마에게는 가족이 있었지만 테이트가 없었던거네. 

카야는 자신의 결핍(버림과 거절. 공동체에 수용되지 못하며 느낀 다수의 악의. 생존. 불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맞선다. 파이터 카야. 결국 카야는 지지 않고 자신만의 것을 세상에 보여주게 된다. 카야가 포기하지 않고 싸울 수 있도록 격려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이름이 없는 사람들도 있다.(재판 장면에서 그들은 선의를 행동으로 보여준다. 그 작은 선의들이 다수의 악의를 버티게 해주지 않았을까?) 카야의 삶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늘 그 모습 그대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자연(신의 존재라고 생각했다.)과 그 세계에 속한 생물들. 선데이 저스티스! 네가 카야의 무거운 잠을 포근한 잠으로 만들어주었다고!!!! 그들의 선의를 잡기로 선택한 것은 카야의 의지이다. 카야 엄마에게도 있었으리라 테이트가... 엄마는 그 선의를 잡기로 선택할 의지를 보일 수 없었다. 그 개새끼... 

아 그리고 마지막 테이트가 발견하게 되는 카야의 다른 한 조각. 반전은 아니었다. 카야가 풍성한 삶을 살았구나를 느낄 수 있어 한번 더 좋았다는...

나는 카야를 보며 너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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