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슬픈 책이 아니다. 읽을 때마다 따스하고 든든함을 느끼는데 항상 눈물이 난다. 딱히 누구때문에 무슨 사건때문에 슬프다는 아닌데 항상 눈물이 난다.
다양성. 이 책을 읽고 제일 처음 머릿 속에 떠오른 단어였다. 코뿔소 노든의 행복한 어린 시절을 함께 했던 이들은 코끼리들이다. 그 뒤에 노든이 만난 코뿔소는 야생에서 자란 코뿔소이다. 노든에게 가족의 행복을 알게해준 아내와 딸. 노든과 아내는 같은 코뿔소지만 전혀 다른 성장 배경을 갖고 있어 생활 문화가 달랐다. 함께 하는 시간 동안 서로에게 가르치고 배우며 이해하고 넓어지게 된다. 그 뒤에 만난 앙가부 역시 같은 코뿔소지만 평생을 동물원에서만 보낸 또 다른 문화를 가진 코뿔소이다. 앙가부는 노든을 통하여 야생을 경험하고, 노든은 앙가부를 통해 삶의 다른 문을 열게 된다. 치쿠와 웜보. (웜보는 정말 짧게 등장하지만 그의 존재는 치쿠가 나올때마다 늘 같이 따라오게 된다. 그래서 웜보가 이야기 속에서 그렇게 짧게 등장했다고 느껴지지 않는다.한번도 본 적 없지만 나는 노든 아빠를 통하여 치쿠와 웜보 아빠의 삶의 태도와 지혜까지 얻게 되었으리라) 그들은 펭귄이다. 그리고 노든에게 어떤 존재라고 규정하기 어려운 하지만 생태계 구성원 중 하나인 인간들까지. 생물의 다양성은 생태계를 유지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고 배우는데 정작 우리의 삶 속에서 다양성을 얼마나 존중하는지 의문이다. 노든은 지구상에서 하나 남은 유일한 흰바위코뿔소이다. 종의 다양성을 유지하는 것에도 실패하고 (인간의 욕망이 가진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그렇다면 문화적 다양성은 존중받는 사회인가?
자신의 삶은 자기의 길을 혼자 걸어가야 한다. 하지만 매 순간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하게 버려두지 않는다. (가장 감사한 부분이지만 내 슬픔 포인트이기도 하다.) 노든도 치쿠도 나도 자신의 삶은 오롯이 자신의 힘으로 걸어가야하지만 그 과정에서 선물같은(정말 뜬금없이 주어지니 선물이지) 존재들을 만난다. 그 존재들이 편안함을 주기도 하고 안전한 공간을 만들어 주고 행복과 기쁨을 주고 힘을 주기도 한다. 나의 내일은 나만의 것이 아니다. 나와 함께 걸었던 존재들과 함께 만나는 날들이다. 그래서 내 마음대로 내일을 버릴수도 허비할수도 없다. 나만의 시간이 아니니까... 하지만 나 혼자 걸어가야 한다. 그래서 나는 생태계의 구성원으로 나의 선택과 행동을 선하게 하고 싶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도 그런 마음이면 좋겠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노든일수도 치쿠일수도 노든의 아내와 딸을 앗아가는 총을 든 인간이 될 수도 있으니.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노든의 코와 귀는 자라지 않았다. 대신 뿔이 있을 뿐이었다. 노든은 어렴풋이 자신이 코끼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코끼리들은 노든의 코나 귀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무리가 따르던 할머니 코끼리는 이렇게 말했다.
"눈이 멀어 이곳에 오는 애도 있고, 절뚝거리며 이곳에 오는 애도 있고, 귀 한쪽이 잘린 채 이곳으로 오는 애도 있어. 눈이 보이지 않으면 눈이 보이는 코끼리와 살을 맞대고 걸으면 되고, 다리가 불편하면 다리가 튼튼한 코끼리에게 기대서 걸으면 돼. 같이 있으면 그런 건 큰 문제가 아니야. 코가 자라지 않는 것도 별문제는 아니지. 코가 긴 코끼리는 많으니까. 우리 옆에 있으면 돼. 그게 순리야." p.12
사람들은 겉에 드러난 것만을 보고 믿는다. 하지만 코끼리들은 바보가 아니다. 사람들은 이런 테스트로 코끼리를 시험했지만, 코끼리는 언제나 심사숙고 끝에 스스로의 앞날을 직접 선택했다. p.14
"하지만 너에게는 궁금한 것들이 있잖아. 네 눈을 보면 알아. 지금 가지 않으면 영영 못 가. 직접 가서 그 답을 찾아내지 않으면 영영 모를 거야. 더 넓은 세상으로 가. 네가 떠나는 건 슬픈 일이지만 우리는 괜찮을 거야. 우리가 너를 만나서 다행이었던 것처럼, 바깥세상에 있을 또 다른 누군가도 너를 만나서 다행이라고 여기게 될 거야. p.15
너를 만나서 다행이었다고 말을 하면서 마음에 아쉬움이 하나도 없는 날이 올 것이라 믿는다. 나만 그 행운을 누릴수는 없으니까.
"훌륭한 코끼리는 후회를 많이 하지. 덕분에 다음 날은 전날보다 더 나은 코끼리가 될 수 있는 거야. 나도 예전 일들을 수없이 돌이켜 보고는 해. 그러면 후회스러운 일들이 떠오르지. 하지만 말이야. 내가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 것들도 있어. 그때 바깥 세상으로 나온 것도 후회하지 않는 몇 안 되는 일들 중 하나야." p.18
마음에 꽤 들었던 장면. 우리가 되어 가는 과정. 우리도 꽤 많은 것들을 함께 보았다. 몸이 다 기억하고 있고 그래서 옆에 없어도 우리라고 할 수 있겠지? 그런데 이제는 눈 앞에 있어도 온통 모르는 것 투성이인데... 그래도 우리일까? 한때만 우리라고 부를 수 있는 관계는 우리일까?
노든과 치쿠와 알은 걷고 또 걸으면서 많은 것을 함께 보았다. 온통 모래뿐인 언덕을 보았고, 가시가 촘촘하게 박힌 덩굴나무가 얽혀 있는 길을 지나기도 했다. 노든의 몸통보다 굵은 나무들이 듬성듬성 자리 잡은 땅을 본 적도 있었다. 까맣고 작은 개미들이 우글우글 모여 있는 좁은 구멍을 들여다보기도 했고, 별이 빛나는 더러운 웅덩이를 발견하기도 했다. 걷다가 지칠 때면, 날개에 물방울이 맺혀서 잠시 쉬고 있는 잠자리와 함께 숨을 돌리기도 했다.
노든은 목소리만으로 치쿠가 배가 고픈지 아닌지를 알 수 있게 되었고, 발소리만으로 치쿠가 더 빨리 걷고 싶어 하는지 쉬고 싶어 하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우리'라고 불리는 것이 당연한 건지도 몰랐다. p.63
내게 가장 소중했던 알을 맡길 수 있는 존재라니...
그날도 긴긴밤이 이어졌다. 노든과 치쿠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먼 곳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겨 있던 치쿠가 노든에게 말했다.
"혹시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알을 돌봐 주겠다고 약속해줘."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코뿔소라고. 알에 대해서는 아는 것도 없을뿐더러 알을 품지도 못해. 그런 소리 할 여유가 있으면 조금만 더 힘을 내."
"난 이제 너밖에 없잖아."
노든은 이런 얘기가 싫었다. 그래서 대충 대답해 버렸다.
"알겠어."
"만약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알을 품어서 꼭 새끼 펭귄이 무사히 태어나게 하겠다고 약속해 줘."
"알겠어. 알겠다고."
"그 애를 바다에 데려다준다고도 약속해."
"알겠어. 알겠으니까 이제 이런 얘기는 그만하자."
오랜만에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맴돌었다.
노든은 치쿠와 처음 검은 길 위에서 보낸 밤이 떠올랐다. p.71
노든은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이라도 하는 듯이 눈을 감고 긴 숨을 내쉬었다가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런데 포기할 수가 없어. 왜냐면 그들 덕분에 살아남은 거잖아. 그들의 몫까지 살아야 하는 거잖아. 그러니까 안간힘을 써서, 죽을힘을 다해서 살아남아야 해."
...
하지만 나는 내가 본 적도 없는 치쿠와 웜보의 몫까지 살기 위해 살아 냈다기보다는 나 스스로가 살고 싶어서 악착같이 살아냈다. 그들의 몫까지 산다는 노든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게 된 것은 그 후로도 꽤 시간이 지나고 나서의 일이다. pp.82-83
노든은 나의 유일한 가족이자 친구였다. 우리는 한시도 떨어진적이 없었다. 내가 바라보는 풍경을 노든도 보았고, 내가 있는 풍경 속에는 언제나 노든이 있었다. 나는 커다른 노든이 곁에 있어주는 것이 좋았다. 노든 옆에서는 마음이 놓였다. p.83
나는 네가 곁에 있어주는 것이 좋았다. 불안하면 물어보면 되니까. 마음이 놓였다. 네가 내 기적이었다. 네 긴긴밤에 내가 있어 다행이었다고 기억해주면 좋겠다. 어쩌면 총든 인간이었을수도 있겠지만.
나는 물속에서 느낀 것을 노든에게 설명할 수 없는 것이, 그리고 노든과 내가 다르다는 것이 너무 서운했다.
"그치만 나한테는 노든밖에 없단 말이에요"
"나도 그래."
눈을 떨구고 있던 노든이 대답했다.
그때 노든의 대답이 얼마나 기적적인 것이었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이 다른 우리가 서로밖에 없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그때는 몰랐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기적이었다. 윔보와 치쿠가 버려진 알을 품어 준 것부터, 전쟁 속에서 윔보가 온몸으로 알을 지켜 내 준 것, 치쿠가 노든을 만나 동물원에서 도망 나온 것, 마지막 순간까지 치쿠가 알을 품어 준 것, 그리고 그 마지막 순간에 노든이 있어 주었던 것..... 모든 것이 기적이라는 단어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 p.94
나는 세상에 마지막 하나 남은 흰바위코뿔소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가족을 위해 목숨을 걸고 뛰어나간 노든의 아내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직 죽지 않은 연인을 뒤로하고 알을 데리고 도망쳐 나오던 치쿠의 심정을, 그리고 치쿠와 눈을 마주쳤던 윔보의 마음을, 혼자 탈출하면 무슨 재미가 있겠느냐던 앙가부의 마음을, 코끼리들과 작별을 결심하던 노든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축축한 모래를 밟으며 나는 바다를 향해 걸어갔다. 내 앞의 바다는 수도 없이 부서지고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두려웠다. 하지만 나는 내가 저 바닷물 속으로 곧 들어갈 것을. 모험을 떠나게 될 것을, 홀로 수많은 긴긴밤을 견뎌 내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긴긴밤 하늘에 반짝이는 별처럼 빛나는 무언가를 찾을 것이다.
어쩌면 언젠가, 다시 노든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내 냄새, 말투, 걸음걸이만으로 노든은 나를 알아보고 내게 다가와 줄 것이다. 코뿔소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다른 펭귄들은 무서워서 도망가겠지만, 나는 노든을 알아볼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코와 부리를 맞대고 다시 인사할 것이다. pp.124-125
나의 긴긴밤을 함께 하는 우리 연수민수. 고맙다.
'들려주고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즐거운 동행자. 여행의 이유 (1) | 2024.07.25 |
---|---|
맞닿아 있는 우리. (1) | 2024.07.24 |
신화로 읽는 여성성 She (0) | 2024.06.29 |
누가 주인공인가?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들) (0) | 2024.06.21 |
차별(복장터지지만)과 연대(재미있다.)의 역사 (2) | 2024.06.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