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려주고픈

The Daughter

쫌~ 2017. 4. 7. 15:12

남겨진 엄마

그 순간 언젠가는 우리에게 이런 평화가 일상이 되리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두 사람 모두 은퇴하고, 아이들도 독립해서 자기의 삶을 살 때가 오면 말이다. 조용히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바람 때문인가 보다 싶어 문을 닫으러 가려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처럼의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나오미가 문 바로 안쪽에 들어와 꼼짝도 않고 서 있는 모습을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의 얼굴에 처음 보는 표정이 서려 있었다. 무언가에 완전히 정신이 팔린 모습이었다. 눈길은 아래로 향해 있고, 입술이 움직이고 있었다. 웃고 있는 건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잠시 나는 애가 무언가를 세고 있거나, 어쩌면 무언가를 기억해 내려고 애쓰고 있겠거니 싶었다.  pp.124-125

자신의 세계를 꿈꾸며 자라난다. 성인이 되어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간다. 동반자를 만나 우리의 세계를 만든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우리의 꿈도... 나의 꿈도... 사라져버린다. 딸을 보자마자 이상 신호를 느끼고 캐묻고 싶어하는 마음과 모른척 자신의 예민함으로 치부해버리고 싶은 마음. 


케이트는 우리가 십 대 때 물고기가 물을 마시듯 술을 먹었었다고 말하곤 했다. '십 대가 이것저것 실험해 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속삭였다. 나오미가 피곤하고, 서먹해지고, 말이 없어지고, 담배 냄새가 나는 것 말고도 무언가가..., 다른 무언가가 있다고 말이다. 니키타와 포옹하는 나오미를 보며, 나는 조만간 나오미의 피곤이 풀리면 허심탄회하게 한 번 얘기를 나눠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오늘 밤은 나오미가 주인공이었다. 오늘만큼은 깐깐하게 굴 수 없었다. p.125

not now. 적당한 때라는 것이 언제일까? 당장 깐깐하게 굴었어야 하는 것인가? 제니가 나오미에게 깐깐하게 굴지 않았던 저 날의 자신이 보여준 아량이 아이에게 좋지 않았다는 죄책감이 묻어 있지만... 저렇게 매 순간 고민하던 제니에게 아이들은 숨막히고 도망치고 싶었음을 호소한다. 


"저도 모르겠어요. 기다리다 깜빡 잠이 들어 버려서." 이 말에 마이클의 눈이 조금 휘둥그레지는 것 같았다. 나를 아이가 한밤중에 몇 시에 들어왔는지도 신경 쓰지 않는 무심한 엄마로 본 것일까? 잠들 생각은 없었다. 가끔은 너무 피곤해서 자리에 앉자마자 잠에 취해버릴 때가 있었다. 어쨌거나 이런 것을 일일이 설명하는 것은 의미 없다. 지금 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pp.150-151

제니가 느끼는 좋은(?) 엄마상. 아마 제니가 사회화되며 학습된 것이 아닐까? 자신의 신념을 직업으로 실현시키면서도 가정까지 (심지어 그 가정에 다 큰 성인 남성인 남편까지 포함하여) 돌보는 것이 당연한 여자가 엄마라면 누가 할 수 있겠는가?

애 아빠가 에드와 계속 연락을 하고 있는 줄 알았더니. 결국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는 평생 바빴다. 생일에도, 어버이날에도, 그리고 가끔은 크리스마스나 휴가 때도. 이 모든 책임을 내가 다시 짊어져야 한다. 하지만 그 책임을 그도 함께 나누고 있다고 생각했던 시절에도 내가 느끼는 책임감의 무게는 지금보다 무거웠다. 그가 떠나고 난 후에는 오히려 그 부담이 가벼워졌다는 것이 참 역설적이다. 어쩌면 그냥 내가 마음을 다잡는 법을 익힌 덕분에 그런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면 지금 마음에 솟아오르는 이 실망감은 무엇일까?  p.240

제니가 테드에게 분노했던 만큼 분노했다. 더 했을지도 모르겠다. 왜 함께 시작한 가정을 가꾸는 것이 여자의 몫인가! 

베스의 집은 아주 평화로웠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 옆에는 진흙투성이 럭비화도 없을 것이고, 껑충거리며 달려드는 개도 없을 것이다. 두 사람은 그날 하루 병원에서 함께 겪었던 일들을 얘기하며 드라마를 썼겠지. 그 드라마 속에는 아이들 숙제는 어떻게 시킬것이며, 집에는 몇 시까지 들어오게 할 것인가 하는, 답도 없는 구질구질한 가족 문제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베스는 테드에게 와인을 한 장 따라주고, 분위기 잡히는 음악을 틀어놓고, 조명도 어둑하게 줄여 놓았겠지. 베스는 그에게 바짝 붙어 앉아서 그가 하는 말을 빼놓지 않고 모두 들어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섹스를 못할 만큼 피곤에 절어 있지도 않았겠지. p.250

테드의 변은 딱 한 마디였다. 이유가 없었다. 그냥 그 여자가 거기 있었다는게 이유다. 도망치고 싶은 현실을 장면은 둘 다에게 펼쳐졌는데, 누군가 너무 적극적으로 도망쳐버리면 남은 사람은 도망치고 싶어도 그 자리에 서 있을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었다. 왜 눈치채지 못했을까? 생각해 보면 에드가 여자 문제로 테오를 놀리는 것은 한 번도 본 족이 없었다. 항상 그 반대였다. 나는 테오가 미술에만 푹 빠져 있어서 여자 친구가 없는 줄 알았었다. 그 이상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이면에 숨겨진 의미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었다.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일 게다.  p.192

리허설 때문에 나오미는 무척 피곤했다. 나는 늘 방방 뛰어다니던 나오미가 언제부터인가 뛰어다니지 않는 것을 눈치챈 적이 있다. "그래서 검사를 해봤는데..." 침묵이 흘렀다. 왜 그랬을까? 왜 나는 이것들을 모두 하나로 엮어볼 생각을 못 했을까? 아침 식사를 거르고, 늘 피곤해하고, 감정 기복이 심하고, 지금 생각하니 모든 것이 너무도 분명하게 보인다.  p.207


나는 아이들과 충분히 함께하지 못했다. 나오미는 행방불명되기 전 몇 주 동안 내게 말을 걸지 않았었다. 하지만 나오미가 말을 걸 때까지 내가 충분히 기다리며 집에 머물러 있었다면 나오미도 내게 말을 꺼냈을지 모른다. 내가 나오미의 사소하고 작은 변화드을 마음 한구석으로 밀어두지 않고 하나하나 집중하고 있었더라면 내가 나오미를 도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언젠가 테드에게 내가 집에 있으면 아이들이 싫어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삶을 쌓아올리기 위해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했던 것일까?  pp.259-260

케이트는 우리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엄마가 꿈에도 몰랐었다고 말했었다. 그런데 나는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나는 눈에 보이는 단서들조차 무시해 버렸으니까. p.260


남겨진 엄마인 제니. 공간에 대한 묘사와 딜레마에 대한 묘사가 흥미로운 책이었다. 처음에는 쉽게 속도가 붙지 않았으나 제니가 보건소에서 선입견(경험에 의한 판단...이라고 하고 싶음)으로 환자를 객관적으로 진단하지 못하는 이야기부터 몰입되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학부모를 만나게 될 때, 나 역시 경험에 의한 판단을 먼저 하게 된다. 그들이 하는 나에게 전하는 이야기보다 그들의 행동을 먼저 살핀다.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어하는 제니의 마음과 어떻게 해서든 책임있게 해결하고 싶어하는 마음의 충돌을 엿보면서... 너무 속상했다.

그다지 완벽해보이지 않는 엄마였는데, 아이들이 제니에게 내뱉는 이야기는 숨 막혔다는 것이다. 도망치고 싶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엄마가 해야만 하는 부분들이지 않은가? 이 가정에서도 아빠는 상징적인 존재이다. 물론 사라진 딸로 인하여 고통받고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지만 아빠는 나아감을 택한다. 누구의 선택이 옳은 것인가에 대한 판단을 할 수는 없지만 테드의 선택은 남자이기에 좀 더 손 쉬운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의 마지막은 혼란스러웠다. 

정말 나오미인지? 제니의 환상인지? 

참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정말 다행인건가? 사라진 딸이 아니라 남겨진 엄마... 버림받은 것 같은 기분이 계속 들어 씁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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