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려주고픈

천선란 유니버스 생태계

쫌~ 2021. 11. 11. 23:40

 책보다 유튜브를 더 많이 보는 요즘 독서의 형태가 많이 바뀌었다. 동시에 다른 장르의 책을 함께 읽는다. 예전에는 책 한 권을 다 읽어야 다른 책을 읽을 수 있었다. 동시에 여러 세계를 왔다갔다 할 수 없었는데... 독서 스타일이 바뀐 것이 아니라 실은 책에 빠져드는데 걸리는 시간이 엄~~청 오래걸린다는 것. 한 마디로 요즘 나는 산만하다. 이런 내가 앉은 자리에서 뚝딱! 분위기나 좀 살펴보려고 들여다봤는데... 책을 놓기가 너무 아쉬웠다. (심지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퇴근시간이 지나갔음에도)  생각지도 못했던 사건이 나오는 것도 아니기에 뒷 이야기가 궁금해서가 아니라 (아!!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할까?) 앞의 몇 장을 읽으면서 아직 캐릭터 빌드 업이 다 된 상태도 아닌데 나는 나인의 세계에 들어와있었고 나의 세계와 전혀 다른 세계면서도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 너무나 그럴듯한 나인의 세계에서 나가고 싶지 않았다. 

1부 속삭이는 잎

나이를 먹는다는 건 세상의 비밀을 한 꺼풀씩 벗겨 내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벗겨 낸 세상의 비밀을 한 겹씩 먹으면, 어떤 비밀은 소화되고 흡수되어 양분이 되고, 어떤 비밀은 몸 구석구석에 염증을 만든다. 비밀의 한 꺼풀을 먹지 않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세상의 시스템은 그걸 먹어야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도록 설정되었다. 그러니 언젠가는 반드시 먹어야만 하는 것이다. p.28-29

그렇게 말해서 알아들을 사람들이면 애초에 그런 말 하지도 않았어. 그리고 좋게 말하면 자기 말이 통하는 줄 알고 계속 찾아와서 설파해. p.35

진실은 무섭다. 뒤늦게 깨달은 진실은 더더욱 무섭다. 미래가... 현재는... 그렇게 미래와 현재가 자신의 두려움을 밝혔을 때 나인은... p. 39-40

지금 당장은 말라 죽은 새싹을 보고도 눈물이 나지 않지만, 때가 되면 소중해질수도 있으니까. 세상의 비밀을 벗겨 먹는 것에 때가 있듯이 언젠가 새싹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순간도 자연스럽게 오리라. 안 오면 어쩔 수 없고. p.49

문제에는 반드시 해결이 따라야 하는데, 나인을 심란하게 만드는 이 일에는 해결이랄 게 없다. p.57

"그냥 이거 말고 다른 게 있는 거 같아. 막 눈물이 나고 그런 일. 안 되면 열 받고, 분하고, 내가 너무 싫고, 그렇지만 결국 하게 되는 그런 일." 사람들은 그걸 간절하지가 않은 것이라고 표현했다. p.58

나인은 효정이 흘리는 눈물의 온도를 안다. 나인이 태권도를 포기하게 만든 눈물이었으니까. p.59

그러니까 마음이란 참 이상하다. 몇 백 광년 떨어진 곳에서 온 존재라는 말을 듣기 전까지 이곳의 일들은 너무 당연했는데, 그 말을 들은 다음부터 이 행성이 묘하게 자신과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서 말을 하고, 숨을 쉬고, 먹는 일 자체가. 세상이 뒤바뀐 것도 아니고 단지 모르고 있던 비밀을 알게 된 것뿐인데 그때부터 모든 것이 낯설고 어색하게 느껴졌다. 딱 도장처럼. p.60

엄마는 요한을 만나기 위해 아빠를 거친 것 같았다. 반드시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기 위한 절차였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좀 편했다. 유별나고 대수로운 게 아니라 거쳐야 할 단계의 한 과정이라 생각하면. 과정. 그러니까 미래는 이 과정이 두려웠다. 아무리 노력해도 모든 게 다 정해져 있다면 자신이 거부해도 결국 신의 뜻대로 흘러가게 되는 것이 아닌가. p. 85

자백을 유도할 수는 없지만 나인이 보고자 하는 건 찰나다. 찰나의 눈빛, 찰나의 입꼬리, 그 찰나의 표정. 권도현이 제 말을 들어주기나 할지 모르겠지만 그건 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p.122

고민과 골칫거리와 근심은 왜 서로 달라붙어 찾아올까. 하나 끝나면 하나 오고, 또 하나 끝나면 잠시 쉬었다가 다시 하나 오면 얼마나 좋아. 이렇게 생각해 봤자 그런 일은 순조롭게 차례로 오지 않는다는 걸 나인도 알고 있다. 언제나 모든 일은 한순간에,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다. 사람의 인내심과 한계를 박박 긁으면서. 그러니 방법은 딱 하나다. 세상 일이 신경을 전부 긁기 전에, 더 큰 일이 또 들러붙기 전에 발목에 채인 일부터 빨리 치우는 것이다. 애초에 알지 못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알아 버렸는걸. 그리고 도저히 모르는 체할 수 없는걸. p.130

우연. 핑계로 쓰기는 좋지만 실상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않는 치사한 단어. p.132

우연은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난다. 세상이 정말 정해 둔 것처럼. 쥐 죽은 듯이 기다리다가 해결사가 나타나면 그제야 소리친다. 꽁꽁 숨어 있다가. 평소에는 보이지도 않다가. 이렇게 갑자기. 정말 치사하게. p.134

 지모와 나인, 나인과 미래와 현재, 나인과 승택과 지모, 나인과 지모와 원우 그리고 도현 

 나인의 엄청난 출생(?)의 비밀은 갑작스럽게 아무일도 아니란 듯이 밝혀져서 좀 당황스러웠는데...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나인의 출생의 비밀은 중요하지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아!! 정말 읽어봐야 안다. 어서 이 책을 읽은 사람과 입 좀 털고 싶다!!!) 1부는 흥미롭게 읽다가 2부는 (무슨 주책스러움인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읽었다.

2부 심장을 삼킨 나무

"인간이 가지고 있던 에너지와 양분을 식물이 전부 흡수하면 그 식물에 인간의 영혼이 깃든데. 수목장 같은 거야. 죽은 뒤에는 영혼이 이미 빠져나갔기 때문에 인간들이 하는 수목장으로는 그렇게 되지 않지만. 나도 예전에 그런 경우가 있었다고 듣기만 했어. 살아 있는 인간의 몸을 식물이 관통해야 하는데 그런 경우는 거의 없으니까...., 실제로 본 건 나도 오늘이 처음이라 좀 당황스럽네." p.152

지모는 대응하기보다 묵묵히 싸워 가는 쪽을 택했다. 모두가 동의해야 하는 안건에 굽히지 않고 표를 던져 매해 안건이 다시 올라오게 만드는 식으로. 그렇게 해야 결국 이긴다. 소수가 다수를 이기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지겹고, 지긋지긋하고, 진절머리 나게 구는 것이라고. ... 가장 못 견디겠는 것 하나만 지키며 살라고 했다. 물론 조건은 있다. 나인이 위험해지지 않는 한에서. p.156

"차라리 피곤하게 살래. 답답하게 사는 건 진짜 못 견디겠어." p.157

"저 선배는 세상에 딱 저 선배 하난데 사라졌잖아." p.158

그걸 어떻게 모르는 척해. 사람 한 명이 지구에서 멸종했는데 p.159

"아니 그 말 한마디로 인간들은 네가 뱉은 모든 말을 거짓말로 여길 테니까." 나인은 이런 말들을 뼈에서 나온 말이라 표현했다. 깊은 상처는 뼈에도 흔적을 남기는 법이니까. "인간들은 그래. 믿을 수 없는 게 하나 생기면 모든 걸 다 가짜로 만들어 버려." p.163

피가 극도로 식으면 어는점에서 굳는다. 끓는점의 폭발은 분노와 모멸이고 어는점의 폭발은 상처와 서글픔 같다. ... 나인은 무언가를 감춤으로써 미래에게 상처를 준것이다. 드러낸 게 아니라 감춰서. p.171

그 뒤 아무리 일이 고되어도 집에 오면 꼭 화단에 있는 식물을 손질했다. 잠자는 시간은 줄어들었지만 부부의 낯빛에는 생기가 돌았다. 책임져야 할 게 생겨서 그런거라고, 지모가 언젠가 말해 주었다. p.178

누군가를 잃는다는 것은 세상 바깥에라도 그 이름을 붙여 두고 싶은 것이라고. 파도에 휩쓸릴지라도 모래에 이름을 적어 두는 것이라고. p.178

"그냥 타이밍의 문제잖아. 아직은 아닌 것뿐이지. 영영 아닌 건 아니잖아. 그러니까 걔도 언젠가 말해 줄 거고, 너도 언젠가 말해 줄 거잖아." p181

현재가 말한 타이밍이란 이런 거라고 나인은 생각했다. 말이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간. 그 기간을 넘겨서는 안된다. p.186

사랑을 지속하려면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로 충분하지 않고, 그 말에 담긴 온도와 흐름까지 같아야 한다. p.196

물의 상성이 다르다면 수어지교를 맺으면 된다. 물과 물고기로. p.198

승택은 자신이 사는 세계의 크기와 나인이 사는 세계의 크기가 다르다는 걸 알았다. ... 단지 자신과 나인의 세계가 다르다는 것만이 확실했다. 그래서 자꾸 나인이 하자는 대로 하게 됐다. 원래 큰 쪽에 작은 쪽이 흡수되기 마련이니까. p.210

안다는 것은 좋은 일일까. 자신은 알고 있었기에 열악한 환경에 졌고, 나인은 몰랐기에 이 환경에 적응한 것일까. 그 한 끗 차이 ... 승택은 계속 물었다. ... 나인이 크고, 넓고, 깊어지는 동안 자신은 살아남기 위해 웅덩이에 잠겨 있었다는 사실이. 딱 둘뿐인데. p.212

해 보니까 어떻게든 된다고. 무작정 소리를 질렀더니 그 메아리를 듣고 누군가가 반응을 했노라고. p.252

안다는 이유로, 무언가를 좋아하는 이유로, 세상이 믿지 않는 걸 믿는다는 이유로, 허락되지 않은 걸 탐한다는 이유로 p. 266

우는 것만큼 정확한 마음의 표현이 있던가? 무엇을 위해, 누군가를 위해 운다는 건 그만큼 마음의 큰 부분을 내어 주었다는 뜻과 같다. p.279

도현이 그 경계의 선을 밟기 전에 누군가가 다시 이곳으로 끌고 와야 한다. 비린 냄새와 어두운 산이 존재하는, 고통이 있다르는 잔혹하기만 한 세상으로. 그렇지만 내일이 있는 세상으로. p.316

아이들은 자란다. 각자의 속도대로 각자의 방향으로 자란다. 그들이 자라는 것은 서로가 있어서다. 각자 자신의 질문과 문제에 몰두해 있으면서도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서로에게서 배우고 자극을 받으며 자라난다. 친구이기에 같은 종족이기에 우리의 존재를 알았기에 등 어떤 이유들을 붙이면서 용기를 내서 무언가를 일단 시도해보는 장을 서로가 만들어주고 있다. 아이들은 자라고 싶어한다. 

3부 파도가 치는 숲

너희 가족도 본 적 없는 하느님 믿잖아. 근데 나는 봤어. 본 걸 믿는 게 도대체 뭐가 그렇게 문제냐. 왜 너희 아버지는 사람들한테 존경받고 돈도 많이 버는데 왜 나는 미친놈이 되냐. 믿으라고 한 적도 없는데. 나만 다시 보겠다는데. 할 말이 있어서 그 말만 좀 하겠다는데. p.328

그런 마음은 가지고 태어나는 건가 봐요. 누구나 쉽게 가질 수 없는 것 같아요. 가끔 생명을 죽이는 일에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인간들이 있잖아요. 그런 것처럼 나인도 그런 애 같아요. 사람을 살리는 일에 이유를 두지 않는. 요즘 그 애는 그런 일을 하고 있어요.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을 함께 구하려고. 강한 힘을 가지면 그런 선함도 함께 깃드는 걸까. 아니면 그런 용기를 가지고 있기에 강한 힘이 자리를 잡을 수 있는걸까. p.334

지모가 엄마인든 이모이든 언니이든 상관없이 자신도 지모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아도 전해질 수 있도록. "그러니 오래 이곳에 있어. 네가 만난 이 세상을 다 누리고, 세상이 변하는 걸 목격하고, 기쁨과 슬픔을 전부 겪고나서 이 세상에 미련이 없어질 때." p.361

한 번쯤 나올 수 있는데도 단 한 번도 그러지를 않았어. 네가 정말 네 아버지를 사랑한다면 너는 네 아버지가 만든 결계를 언제든 깰 수 있는 아이가 되었어야 해. 그러면 아버지가 만든 결계를 하나씩 깨며 세상 밖으로 나아겠겠지. 너는 아버지가 무서웠던 거야. 말 잘 듣는 착한 아이로는 자랄 수 없거든." p.386

"응, 죄책감이 유효한 마지막 기간이거든. 그 영역을 넘어가면 벌을 받아도 그걸 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래서 잘못을 깨달을 수 있는 마지막 기간이기도 하고, 그건 죄를 지울 수 있다거나 회개를 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야. 자신이 저지른 일이 죄인 걸 깨닫고, 그 죄를 평생토록 어깨에 짊어지고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거지. 매 순간 후회하고, 매 순간 죄스러워하며, 매 순간 시간을 돌리고 싶어 하며, 매 순간 스스로를 괴물처럼 여기면서" ... "고통스럽다는 건 살아 있다는 증거 아니겠니?" p.388

"누군가는 기억하고 있어야 하니까. 누구든 그다음 세대에게 진실을 알려 줘야 하니까. 비록 지금은 수면 위로 드러나지 못하는 진실이라고 해도 누군가는 반드시 기억하고 있어야 돼. 모두가 야만성에 잠식되지 않게. 그것이 윤리적으로 잘못된 짓이라는 걸 알려야지. 한마디로 네가 이 비밀서고의 열한 번째 주인이라는 거야. 나인은 영 믿음직스럽지 못해서." p.390

"무조건 믿어 준다고 해서 고마워."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한 사람의 인생을 존재하게 한다. p.476

  꽤 오래전에 검은 수련이라는 프랑스 소설을 읽으면서, 이게 묘사구나...라며 감탄을 했었다. 글을 읽는데 눈 앞에 어떤 장면이 펼쳐지는... 나인을 읽으면서, 그래 이런 마음이었어. 감정을 이렇게까지 찰떡같이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이들의 앞으로의 이야기와 과거의 이야기를 계속 듣고 싶다. 지모와 승택과 나인. 나인과 미래와 현재. 이렇게 매력적인 캐릭터들을 이대로 내버려두지 않길 바란다. 간절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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