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쫌~ 2021. 12. 3. 20:39

김 현 시인의 에.세.이.

                                     다정하기 싫어서 다정하게                                                                          

   
누군가에게 기대고, 
말없이 어깨를 낮추는 것은 각각 아름다운 일이지만,
역시
엇갈리지 않고
동시에
이루어질 때 더 사랑스럽다.
나란히 숨을 고르는 일.
사랑은
모쪼록
그런 일.

p.227
(봄에는 뭐하세요)

이 책을 읽기 전 황정은의 에세이 일기를 통해 황정은이 보여주는 세상의 이야기를 보았다. (너무 좋았고 책을 다 읽기도 전에 누군가에게 영업했다는...) 솔직하게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시를 읽은 기억이 없다. 글자의 수가 적은데 그 속에 담겨있는 것이 너무 많고 그 중 어느 한 타래도 잡을 수가 없는... 그렇게 20여년을 살아왔는데 낯선 장르에 속해 있는 작가의 에세이를 읽게 된 것이다. 책장을 한 장 넘길때까지만 하더라도 아... 이게 뭐지? 무슨 이야기이지? 엄청 산만하고 무슨 글자 더미 속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기분이었다. 일단 접어두고 그래도 출근하는 길에 가방에 넣어갔다.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서성거리던 10시에 가방에 삐쭉 보이는 주황색 표지를 보고 시끄러운 속이나 달래보자는 심산으로 교실을 서성이며 중얼 중얼 소리내어 읽기 시작했다. 그 날 점심시간에 1년만에 책을 들고 식당으로 내려갔다. 책을 놓기가 싫어서... 이토록 소리내어 읽기에 찰떡인 글이 있다니... 이 책에서 나는 작가의 머릿 속을 마구 돌아다니는 경험을 했다. 그의 생각의 한 자락을 잡고, 여기 저기 따라다니다 어느 순간 내 머릿 속에서 이리 저리 옮겨다니고 있었다. (나의 촐싹거림은 여전하여 그 날 오후 아직 책을 반밖에 읽지 않은 채로 또 이거 꼭 읽어보면 좋겠어. 대박이야...라고 영업하고 있었다.)

말 않고 묻지 않아도 속을 아는 사이. 그런 사이란 없다는 걸 이제 아는 나이인데. p.18 (인생이란 말이야)

힘에 부치다와 힘이 부치다는 다른 듯 같은 말 같고. 언젠가 힘에 부친 하루 끝에 영화... p.25 
덧붙이자면 일렁이다는 여름 동사의 일종. 겨울의 동사는 속삭이다. 봄의 동사는 어른거리다. 가을의 동사는 흘러가다. 어른거리고 일렁이고 흘러가 속삭이는 마음의 사계절. p.26 (간절한 마음)

그리고 정말 단어 하나 하나를 기가막히게 쓴다. 어쩜 이렇게 이쁘게 글을 쓸까? 그의 시가 너무 궁금해졌다. 

사람에게 질리는게 사람이고 질린 사람에게 구원을 구걸하는 게 또한 사람이니까. p.39 (싹수)

이 책이 내 손에 도착하던 날. 그 날 내가 그랬다. 질리고 또 질렸던 날. 

효창공원역에서 출발한 경의중앙선 열차는 용산을 지나 이촌, 이촌을 지나 서빙고, 서빙고를 지나 한남, 한남을 지나 옥수, 옥수를 지나 응봉, 응봉을 지나 왕십리, 왕십리를 지나 청량리, 청량리를 지나 회기, 회기를 지나 중랑, 중랑을 지나 상봉, 상봉을 지나 망우, 망우를 지나 양원, 양원을 지나 구리에 도착한다. p.48 (전철타고 망원에서 구리가기) 

크게 웃으며 읽은 부분. 2021년 하반기의 내 모습이었다. 구구절절 나도 그러고 있다. 서울에서 지낸 10년의 시간 동안 딱 한 번 지나가며 들렀던 효창공원. 그 곳에서 봤던 볕이 잘 드는 오래된 빌라. 그 날 나와 내 친구는 여기 너무 좋다.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우린 그 곳의 교통상황도 집값도 주변 인프라도 아무것도 몰랐다. 단지 그 일요일 오후의 따스한 볕이 드는 효창공원을 바라볼 수 있는 오래 된 빌라를 보며 여기서 살면 좋겠다..라는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 날 이후 난 효창공원을 막연하게 좋아한다. 경의중앙선이 지나는 효창공원, 청량리(할머니 냉면. 내가 유일하게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가게. 코로나 잠잠해지면 꼭 먹으러가고 싶은 1순위), 회기(애증의 지역), 양원, 구리. 경의중앙선 라인에서 살 것 같다. 앞으로도

작은 마음의 창으로는 작은 빛이 들고, 큰 마음의 창으로는 큰 빛이 들지만, 두 마음 모두 다른 빛깔로 물들지요. p.62 (가을엽서)

아버지의 인생과 내 인생이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될까봐 방어적이었는지도 모른다. 또한, 아버지도 무서웠을 것이다. 아들에게 들려준 자신의 인생이 정말로 시시한 것이면 어쩌나 하고. p. 68
... 귀 기울여 들으며 나는 "(아버지는) 말없이 말하고 (아들은) 들리지 않게 듣는다"라고 읊조려 보았다. p.68 (양염)

크고 무거운 행복이 아니라 작고 가벼워서 어디든 들고 갈 수 있고, 언제든 버릴 수 있고, 누구와도 나눌 수 있는 행복. p.90
자식들은 '그때 부모의 나이'가 되는 경험을 통과하며 차츰 부모의 삶을 이해하게 된다. 부모의 삶을 이해한다는 건 결국 자식(나)의 삶을 설명할 수 있게 된다는 것. p.93
울어버리는 사람보다는 울음을 참는 사람의 수심이 더 아득한 법이니까. p.93 (행복한 사람)

물건을 가졌다는 즐거움보단 물건을 갖게 된다는 데에서 더 큰 즐거움을 느낀다고 할까. p.98
물건에 담긴 타인의 언어를 해석하는 데에서 오는 즐거움은 물건을 물건으로만 보는 나를 잠시 다른 차원의 집으로 이동시켰다. p.101
E의 물건, E가 전해온 언어, E에게 연결된 마음 때문에 p.102
... 물건에 대한 '끝 마음'이... p.103 (껍데기)

성별 고정관념과 편견 없이 나와 타인을 긍정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며 공존이라는 가치를 담은 도서를 선정하고 알린 '나다움 어린이책'사업은 귀한 것이었다. 그 선정 작업은 누군가에겐 설명할 수 있는 말로 설명하고, 해석할 수 있는 말로 대답하는 것이었을 테다. p.118 
오랫동안 성소수자 해방에 헌신한 운동가 피터 태철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면 당신이 원하는 세상을 꿈꾸라고 말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꿈이 생겼으니, 이제 나아가자고. p.121 (미래 연습)

어릴 때는 알지 못했으나 어른이란 어디서든 울음을 터뜨릴 줄 아는 이라는 걸 커가며 알 수 있게 되었다. p.145
어른이란 어디서든 웃음을 터뜨릴 줄 아는 이라는 걸 어릴 떄는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쳤다. p.145 (누군가 창문에 입김을 불어 쓴 글씨)

... 마치 자신들의 일인 양 폴짝폴짝 좋아하는 이들의 살뜰한 기쁨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직업의식만으로는 설명할 길 없는 마음의 경로를 탐색하다보면...p.156 (참새의 맛)

그 짓을 당하고 그 짓을 정리하는 데 딱 이만큼의 시간이 걸렸나 봐. 왜 하필 그때였는지, 그 순간 나의 내부에서 뭐가 터졌는지 나도 알 수 없었다. 어떤 폭탄의 도화선은 그렇게도 길다. 그러니까 이제 와서 그런 말을 왜 하니, 라는 말 좀 하지마. p.178 (다섯가지 힘을 하나로 모으면)

 

김현 시인의 더 많은 글을 볼 수 있게되길 희망한다. 정말 재미있는 그리고, 아프지만 다정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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