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려주고픈

기록하다. 남기다.

쫌~ 2021. 11. 1. 23:16

 황정은의 소설은 끝을 보지 못했다. 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했다. 이 문장이 어디에 연결된 문장인지 누구의 이야기인지 쉽게 따라가지 못했다. 에세이가 나왔다는 광고를 보았지만 선뜻 마음이 동하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누군가의 말처럼 에세이 전국시대인 듯 하다. 각 출판사마다 괜찮은 에세이들을 소개하고 있으니... 창비에서 에세이& 으로 황정은 작가의 첫 에세이집 '일기'가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서평단을 신청하였다. 소설에서의 기억이 있어 기꺼운 마음으로 신청한 것은 아니었지만 '일기'라는 제목이 마음을 움직였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의 시선으로 담아내는 것이 일기인데 다른 사람들이 읽고 견딜 수 있는 이야기를 담았을텐데... 어느 정도의 두터움일까 궁금했다. 

책띠지를 좋아하지 않는데, 저 짙은 초록의 띠지 보라색과 너무 잘 어울린다. 첫 장을 열기 전에 마음에 들었다. 띠지 하나에... 팔락 움지인 마음이라니... 가벼워서 좋구나!

 가볍게 읽을 수 없는 이야기지만 마냥 무거워 책장을 넘기지 못할 정도도 아니다. 첫 페이지를 넘긴지 하루만에 다 읽었는데 읽는 내내 남겨두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물론 끊고 싶지 않은 마음이 이겼지만... 남겨 두고 읽고 싶은 마음은 이제 다른 사람들에게 이 책을 적극 권하는 마음으로 바뀌었다.


 하루 작업의 질은 대체로 원고 앞에서 버티는 시간의 양에 달렸다. p.9

 사람들이 목구멍 안에 감추고 있던 것, 그런 것은 그렇게 일단 드러난 뒤엔, 어떻게 될까. 혐오는 어디에나 있어. 내게도 있다. ... 하지만 그걸 남에게 드러낼 권리가 내게는 없어. 그런 건 누구에게도 없다. p.17

 타인의 애쓰는 삶은 나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p.20

울 것 같다는 자각도 없이 무작정 눈물이 났다. 그리운 사람들을 다시 만난 것 같았고 오래전에 잊은 줄 알았으나 실은 좀처럼 잊지 못하고 있던 기억을 만난 것 같았다. p.45


 몇해 전 플로리다 여행에서 디즈니 월드에 갔던 날 아침이 떠올랐다. 정문 앞에서 디즈니 월드 오픈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데, 정문에서 기차가 나오더니 디즈니 캐릭터들이 나와서 너무나 익숙한 (일요일 아침마다 들었던) 음악과 함께 환영의 손짓을 보며... 눈물을 흘렸었다. 저 문장을 읽으며 그 옆에 '디즈니 월드 앞 나'라고 적어놨다. 실은 지금도 그 날의 눈물은 미스테리다.


 이유를 생각하는 것으로 이유를 만들어주고 싶지 않아. ... 혐오라는 태도를 선택한 온갖 형태의 게으름을. p.72

 사람들은 기억하고, 기억은 그 자리에 돌아온다. 기록으로, 질문으로 p.76

 "삶에 별빛을 섞으십시오." p.90


 작가가 읽은 책들의 이야기가 곳곳에 들어있다. 완전 제대로 영업당한 책이 마리아 포포바 '진리의 발견'이다. 저 문장. 삶에 별빛을 섞으십시오. 그리고, 로런 엘킨의 '도시를 걷는 여자들'이다. 작가님 영업왕!


 로런 엘킨은 "걷지 않는 문화가 권위적인 분위기를 만든다"라며 그것이 특히 "여자들에게 나쁘다"라고 썼다. ... "반듯한 격자 모양의 거리, 가까운 쇼핑센터, 끝없이 이어진 공원도로"라는 미국의 교외 구조는 지금 내가 사는 신도시의 구조이기도 하고 아파트로 삶의 질 상승을 바라는 도시민들의 이상이기도 하다. 구조가 문화가 되어버린 환경에서 걷지 않는 여성들은 "이게 다 무슨 의미인지, 자신의 욕구가 무엇인지, 그 욕구가 충족되는지 등을" 고민하지 않으며, 그런 것을 고민하지 않는 여성은 "가족에게서 벗어나 방황하지 않을 것"이라고 로런 엘킨은 쓴다. p.125

 차별받았다는 생각으로 분노할 줄은 알지만 차별한다는 자각은 없는 삶들. p.128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데 이름을 부르는, 그런 일은. p.149

 내용으로 읽히지 않고 입에서 발음으로 부서져도 괜찮은. p.151


 작가님 실패했습니다. 쿠키를 먹는 것처럼 읽을 수 있는 일기가 아니었어요. 생각해보면 일기란 그런거잖아요.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이었는데... 내가 그 사람이 아닌데 그 사람이 느낀 세상을 만나겠다면서... 가볍게 들여다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어요.

  어느 부분이라고 기록하고 싶지 않지만 2021년 가을 이 책의 한 챕터를 읽고 교실에 앉아 꺼이꺼이 울었다.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고, 교실 문을 열고 누가 들어올까봐 걱정도 되었지만 기꺼이 주책스러운 사람이 되기로 하며 한바탕 울고나니... 홀가분함이 있었다. 밑줄도 긋고 인덱스로 표시도 해두었지만 지금은 다시 보고 싶지 않다. 하지만 꼭 다시 읽고 싶은 부분이어서 인덱스를 그대로 붙여두기로 했다.


 나는 성인이 되고 나서도 한참 뒤에야 그 일을 말할 수 있었다. 어느 순간 문득 말하기 시작했고 말하고 나서야 나는 내가 그 일을 말하고 싶어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일을 얼마나 말하고 싶어했는가도. p.181

 그 말을 읽은 덕분에 나는 이 글을 썼다. 그리고 굳이 이 말을 하고 싶어서. 그 수치심은 당신의 몫이 아니라고.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p.183


 이 책은 가볍게 읽을 수 있는 글이 없다. 하지만 꼭 읽어보면 좋겠다. 글의 두터움을, 촘촘함을 견딜 가치가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