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려주고픈

충분하지 않다.(밤에 찾아오는 구원자)

쫌~ 2023. 3. 15. 19:53

역시 천.선.란. (드라마나 영화 관계자분들은 뭐 하고 계십니까?!?!?)
등장인물들의 서사를 모두 담기에는 분량이 너무나 약하다. 완다와 릴리의 서사를 따로 다루고, 수연과 난주의 이야기만으로 구성했어도 충분했을 텐데... 다 너무 아쉽다. 그녀들의 이야기가 다 충분하지 않다. 그레타도... 아니 이런 기가 막힌 세계관을 구축했는데 속은 언제 다 채울 생각이십니까! 작가님. 시리즈물로 각 인물들의 이야기를 채워가면 좋겠다. 나인을 읽고 나서도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었는데 이번 이야기는 시작하다가 끝나버린 듯해서 너무나 아쉽다. 아쉬워도 충분히 재미있다. 충분하지 않은 것은 지면의 분량!!!

"외로움과 고독 끝에 몰린 사람들은 울지 않거든. 잊었다고 해야 할지 소용없는 걸 안다고 해야 할지. 영혼 없는 눈동자로 허공만 바라보며 하루를 까먹지. 슬플 때 눈물이 난다는거, 그래서 울 수 있다는 거, 그 나름대로 살아 있다는 의미야. 의욕을 잃은 사람들은 울지 않거든. 운다고 속이 시원해지는 것도 아니니까. 그렇게 울지 않으면 몸속 수분이 밖으로 빠져나가지를 못해. 그 수분 때문에 피가 아주 묽어지는 거지. 잘 숙성된 적포도주처럼. 그들은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후각이 발달해서 그 고독한 피의 향을 맡을 수 있어." 
수연은 한 인간의 외로움과 고독이 피까지 묽게 만들어 무언가의 표적이 된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p.118
하지만 그럼에도 릴리를 찾아가야겠다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악몽으로 바뀌는 한이 있어도 그리움으로 남기고 싶지는 않았다.  p.133

한 발 더 나가야 하는 순간이 있다. 그런 순간에 나오는 용기는 누구의 것일까? 

"......아서랑, 체스를 뒀던 날, 나를 빨리 항복시킨 게 그날따라 유독 화가 났지. 그냥 화를 냈으면 좋았을 텐데 재미가 없다는 식으로 쩨쩨하게 굴었어. 아서는 그럼 탁구나 당구를 하자고 제안했지만 나는 지루해졌다고 얼굴도 제대로 보지 않고 집으로 갔어. 나와 달리 체스 실력이 날로 발전하는 네가 부럽다고 솔직하게 말하면 됐을걸. 그렇지? 그래도 다음 날이 되면 또 시치미를 뚝 떼고 아서와 체스를 둘 거라 생각했어. 여느 때처럼 말이야. 하지만 그게 마지막이었다. 눈감은 아서에게 백날 말해 봤자 소용없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았어. 어떤 말이든, 설령 그게 나를 부끄럽게 하는 말이라도 말할 수 있을 때 말해야 해."  pp.138-139
매해 수십만 명의 산타가 태어나고 죽었다. 그러므로 아이는 모두 한 명의 산타를 살해하며 어른이 된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산타는 시작일 뿐이다. 그 후 살아가는 동안 꾸준히 많은 것들을 소리 소문 없이 죽인다. 죽인지도 모르게. 그렇게 점점 어른이 되어 가면서 아이는 외로워진다. 함께했던 많은 것들을 죽인 죄로, 안은 텅 비어 있다. 그 안에 사람을 넣으려고 하지만 쉽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아이가 죽여 왔던 여타의 것처럼 아이에게 호의적이지도 않고 변덕이 심하다. 그것이 살인의 형량이다.  p.144
"단어들은 죽어. 시간이 지나면 다 죽게 되어 있어."  p.148

죽이면 사라진다. 흔적이 남는다고 생각했는데... 텅 비어 버리는 것인가보다. 잡을 수 있는 뭔가가 남아 있지 않으니 생생하게 떠올릴 수는 없고... 그래서 그리움이나 추억이나 그런 이쁜 단어를 붙여주나 보다.

"그런 말 하나하나 다 귀담아들으면 정작 들어야 할걸 못 듣는다. 누가 뭐라고 하든 적당히 흘려, 적당히. 피해자나 용의자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야. 너를 작정하고 비난하려는 사람은 못 하는 말이 없거든. 그런 거 다 듣고 있으면 결정적인 힌트를 놓치게 되어 있어. 그러니까 이것도 실력이라 생각하고 흘려."  p.159
사랑은 사랑으로 머물지 않는다. 사랑은 익숙함이 되고, 배신이 되고, 그리움이 되고, 원한이 되고, 편안함이 되고, 증오가 되고, 버팀목이 되고, 파괴자가 된다. 사랑은 이 세계에 존재하는 단어의 개수만큼 그 모습을 바꿀 수 있다. 억압과 자유, 진실과 왜곡, 숭배와 혐오. 이 모든 걸 전부 끌어안는 것이 사랑 그 자체다. 사랑은 사랑이라 혐오마저도 끌어안는다. 완다가 모리스를 믿고 있는 것도 사랑이며, 릴리가 완다에게 사랑의 실체를 알려 주는 것도 사랑이다.  p.191
그러니까 그냥 인간들이 볼 수 있는 세상에서만 사라진 것인데 인간은 이 세상을 다 안다고 착각해서 사라졌다고 떠들어 댔던 거 아닐까.... 인간을 피해 숨어서 산다니. 그만큼 똑똑하고 멋지다니. 회색늑대는 인간과의 술래잡기에서 완전히 이긴 셈이었다. 
"언젠가 인간들도 회색늑대라는 단어를 잊어버릴까?"
"단 한 사람이라도 기억하고 있다면 잊히지 않을 거야."  p.195
증명할 수 없는 관계는 이토록 서러웠다. 둘이 있어야만 과시할 수 있었던 깊은 인연 가운데 한쪽이 먼저 사라지고, 수연은 끊어진 끈을 손에 쥔 채 홀로 추억해야 할 거였다. 그러니 이번이 마지막이다. 이 장례식이 끝나면 수연은 어디서도 은심 할머니의 이야기를 꺼낼 수 없으리라.  p.204
... 언젠가 사무치는 그리움이 밀려왔을 때 꺼내 보고 싶었다. 사물에 밴 채취가 전부 사라질 때까지.  p.209
고작 며칠을 같이했을 뿐인데 평생 그리워하는 건 벌이나 다름없다고. 모든 관계는 처음부터 불평등하다. 더 오래 사는 쪽이 불리했다. 언제나.  p.227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조잘조잘 내뱉는다. 벌이라고 말하지만 내가 더 오래 살아 너를 기억하고 있음이 축복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듯했다. 내가 불리한 편으로 갈게. 

"알아. 하지만 완다, 분명히 알아야 해. 네가 나를 친근하게 느낄 때, 네가 나를 더없이 좋은 친구라고 생각할 때, 나와 오래도록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 그때 내가 인간처럼 느껴져서가 아니라 그냥 내가 좋아서 그런 거라는 걸 분명히 알아야 해. 우리는 달라. 서로의 모습을 상대방에게 원하면 안 돼. 그래야 서로에게 상처 주지 않을 수 있어. 그러니까 나랑 약속해 줘. 내 존재가 버겁고 무서워지면 솔직하게 말하기로 그럼 네 곁을 떠날게."  p.237

"한 번은 봐 줘야 돼. 실수든 아니든, 내가 그런 말을 하더라도 네가 한 번은 다시 찾아와 줘야 돼."  p.238

하지만 회색늑대를 떠올릴 때마다 이따금 마음 한편이 싸늘해지고는 했는데, 릴리는 세상에 없어 볼 수 없다는 것과 세상 어딘가에 있지만 만날 수 없다는 것의 차이라고 했다. 세상에서 사라진 것을 그리워한다는 건 머리와 마음이 일치해 마음껏 슬퍼할 수 있다는 의미이지만, 세상에 존재하지만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것은 그 둘의 불일치를 뜻한다. 마음을 머리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면 슬픔을 부정하고 외면하게 되다가 어느 순간 마음이 곪아 버린다고... .  p.243

나의 문장들. 우리는 달라. 서로의 모습을 상대방에게 원하면 안 돼. 텅 비어 버린 곳에 스르륵 들어올 수 있었던 유일한 존재. 내 공간에 들어올 수 있었다고 해도 다른 존재이다. 그럼 내가 떠날게라고 말하는 사람과 한 번은 다시 찾아와 달라고 말하는 사람. 누가 손을 놓는 사람일까? 

'그런 건 의도한다고 해서 나타나는 게 아니야. 어쩔 수 없이 나오는 거지. 누군가를 아낀다는 마음은 이런 식으로 허락도 없이 마구 새어 나와. 눈빛으로, 손끝으로, 혀끝으로....'  p.240

 

아무리 생각해도 분량이 충분하지 않다. 아니 그리고 왜 죽을 때가 되어서야 나타나는거냐고요오오... 계속 지켜보고 있었던 건데... 곁에 있었으면서... 살았을지도 모르잖아라고 말한다면 입을 찰싹 때려줄 테지만... 그래도 마음은 조금 나아지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