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려주고픈

모두의 축제가 될 순 없었던 것일까?

쫌~ 2023. 2. 18. 17:44

교과서에서 배우고 가르쳤던 것을 제외하고 극본을 본 적이 없다. 즐겨보는 유튜브 채널 중에 민음사 티비가 있는데 스치듯 지나가면 언급되었던 책 중에 희곡집이 있어 호기심에 바로 주문했었다. (작년에 사두고 아직 읽지 않았던 수많은 책들 중 한 권) 2023년이 되어서야 읽었는데 이렇게나 재미있는 것을 너무 늦게 읽었다고 한탄하다가 지금이라도 읽게되어 너무나 다행이다라는 생각으로 왔다갔다 했다. 한동안 계속 소개하고 다닐 것 같은 작품.
글을 읽는데 눈 앞에서 무대가 펼쳐진다. 무대의 중앙에서는 누가 어디를 바라보고 어떤 행동과 말을 하고 있는지… 조명은 무대를 어떻게 비추고 있는지가 보였다. 글을 읽는 것인지 무대 위의 배우들을 보고 들은 것인지 모를 정도. 심지어 음악극은 곡의 선율이 들리는 듯 했다. 음악(또라이 같지만 음량까지도…)과 배우들의 춤사위까지 보이는 듯

1945와 적로 2편이 수록되어 있다.

[1945]


독립이 되었던 해. 모든(?) 우리 민족의 염원이었을 해방. 감격스러운 그 해의 늦가을부터 이듬해 여름까지가 이 극의 시간적 배경이다.
그리고 공간적 배경은 남의 땅이다.
해방을 맞이하여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하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던 국외에 있던 우리네들의 이야기.

원창 그만하게. 다들 험한 시절을 산 거야. 죄를 묻자면 우리 모두 죄인이지. 그 바닥을 들여다보자면 살아 있을 며리가 없지. 그렇다고 다 죽자고 들 건가?
그 사람들이 다들 떳떳하고 부끄러운 게 없어서 그럴까? 아니. 떳떳지 못허구, 부끄러워서 더 그러는 거야. 거짓말루래두, 아주 못쓰게 살진 않었다, 자기를
위로허구 변명허구, 그런데두 왜 이 지경이 되었는가 따지자니 분풀이를 헐 데가 필요허구……, 그게 옳다는 게 아니네……, 그저 사람이란건 그렇게 비겁하고
옹졸한 족속이고, 산다는 건 그렇게 추저분한 일이라는 말이야. P.88

일본인과 함께 살았던 조선인 여자를 흠씬 패던 사람들을 보며 울분을 토하는 영호가 들려주었던 영호의 이야기에 원창이 했던 말.

숙이 유코…… 다이죠부요…… 오다베…… 오다베…… .
아이, 놀라운 속도로 달려들어 떡을 움켜쥐고 물러선다.
아이, 미즈코와 아이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떡을 들고 천천히 멀어져 간다.
망연히 그 자리에 남은 미즈코와 숙이, 철이.
노을이 진다.

일본인 어린이는 죄인이 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명숙 그런 거 없어요.
영호 꿈 없는 사람이 어딨어.
명숙 꿈이라…… 꿈이라…… 글쎄. 이제껏 살아온 게 꿈 같은데, 아직도 길고 긴 꿈속에 있는데, 꿈속에서 무슨 꿈을 더 꾼단 말이에요?
영호 아, 그런 꿈 말고, 그러니까 앞날에……
명숙 앞날…… 꿈에두 그런 건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영호 생각해 봐요.
명숙 음…… 앞날은 모르겠구, 더 이상 꿈을 꾸지 않는거? 이 꿈에서 깨어나는 거…… 그게 내 꿈이야. P.115
명숙 같이 가려구요.
끝순 같이 가? 일본 년하구?
명숙 얘는 내 동생이나 다름없어요.
끝순 동생이나 다름없다? 그럼 너는? 너, 조선 여자가 맞긴 맞아?
명숙 글쎄, 모르겠네. 조선이구, 일본이구 난 모르겠구……
끝순 세상에, 말하는 것 좀 봐요!
명숙 어쨌든, 난 이 애하구 함께 가야 해.
이노인 아니 왜 해필, 다른 인종두 아니구 왜년의 것을……. P.137
명숙 됐어요? 이제 다들 속이 시원해요? 가고 싶어서 간건 아니었어요. 도망쳤지만 소용없었어요. 하지만 그런 걸 말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 어차피 이 아인 ‘왜년’이구,
나는 ‘왜놈들하고 붙어먹은 년’일 텐데. 같이 갈 수는 없는 거죠. 잘 알고 있어요.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영호 난 당신을 데려갈 거예요. 버리지 않을 겁니다. 여러분이 이 여자들을 두고 간다면, 나도 남겠습니다. 이 여자들하고 함께 가겠습니다.
순남 아니, 영호 총각이 왜?
영호 우린 모두 고통을 겪었어요. 더러운 진창을 지나온 겁니다. 지옥을 건너온 거예요. 다들 그을리고 때에 전 건 마찬가지예요, 정도가 다를 뿐이죠. 진창에 더 깊숙이 빠진
게, 더 새까맣게 그을린 게, 이 여자들 잘못은 아니잖아요? 우린 이 여자들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처지를 이해해 줘야 합니다. 운이 나빴을 뿐이에요. 어쩌면 우리 대신,
지독히도 운이 나빴던 거죠. 그런데 다시 저 여자들을 진창 속에 밀어넣구 가자구요? 우리가 씻어 줘야죠. 그 고통을. 지옥에서 건져 내야죠.
사이.
명숙 잠시 낮게 웃는다.
명숙 우린 당신하고 같이 가지 않아.
영호 명숙 씨!
명숙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
영호 내가 뭘 모른단 말입니까?
명숙 당신이 뭔데, 우릴 데려가구 버리구 한다는 거야? 씻어 줘? 우리가 더럽다구? 아니. 우린 더럽지 않아. 누가 누굴 보고 더럽다는 거야! (사이) 이 아이도, 나도 깨끗해.
더러운 건 우릴 보는 당신, 그 눈이지. 씻으려면 그걸 씻어야지. 하지만 아무리 씻어두 아마 안 될 거야.
영호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내 눈이 더럽다니?
명숙 이해해 주겠다구? 이해한다구? 아니. 당신들은 절대 이해 못해. 그래, 우리는 지옥을 지나왔지. 아무런 죄도 없이 우리는 울고 웃었을 뿐이야. 어떤 지옥도 우리를 더럽히
지는 못했어. 하지만 당신 앞에 서 있으면, 우리는 영영 더러울 거야.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대루 갈 거야.
영호 난 당신들을 도우려는 겁니다!
명숙 필요 없어요.
영호 그 일본 여자만 버리면 우린 같이 갈 수 있어요.
명숙 우린 지옥에 함께 있었어. 그 지옥을 같이 건너왔죠. 아무리 말해도 당신들은 그 지옥을 몰라. 아, 그렇지. 그래…… 가끔은 거짓말처럼, 꿈처럼 좋은 때두 있었어. 그건
정말 거짓말 같고 꿈같았지. (미즈코에게) 그 거짓말 속에두, 꿈속에두 미즈코 네가 있었어. 내 지옥을 아는 건 너뿐이야.
미즈코 면스끄……,
명숙 뭐 세상이 끝나기라두 했니? 재수가 없었던 것뿐야. 이번 차를 못 타면 다음 차를 타면 되고, 기차를 못타면 걸어가면 돼. 정 뭣허면 로스케라두 하나 꼬드겨서 차를 얻어
타구 가지? PP.147-150


식구라고 함께하고 있으니 우리라고 말하던 사람들이었는데
우리 정말 한민족일까?

[적로]


여보 형님, 종기 형님, 이도 저도 다 싫대도
날 봐서도 가지 마오.
천지간에 억조창생 수많은 이 있건마는
내 마음 날과 같이 알아줄 이 뉘란 말요?
형님 소리 내가 알고 내 소리를 형님 아오.
종자기 가고 나서 백아 줄을 끊었으니
나와 형님 떨어지면 서로 간에 소릿길을
누가 있어 짚어 주며 어디에다 비춰 보리?
알아줄 이 없는 소리 무슨 흥에 내어 보리? P.170

나를 알아주는 사람. 내가 알아보는 사람.
계선과 종기와 산월
함께 하지 못해도
그 존재한다는 것으로
우리 함께 놀았다는 것으로
더 이상 구멍이 커지지 않은 것 아닐까?


일전에 읽었던 단편에서는 나의 지옥을 알고 있는 너를 버리는 것을 보았는데
이 마음도
저 마음도
다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