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마다 비디오 대여점이 서너 개씩 있던 비디오 세대인 나는 주말 저녁에 가족들과 보던 이연걸의 황비홍 시리즈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평일 오후 시간을 함부로 쓸 수 있던 대학생 때는 시내에 있던 예닐곱 개 극장의 영화를 개봉일에 모두 보기도 하였다.
도서관에서 요즘 영화 리뷰라는 문구를 본 순간. 나도 영화 좋아하는데라며 반가운 마음으로 책을 들고 왔는데... 요즘. 이라는 두 글자를 못 봤다는... 수록된 56편의 영화 중 내가 본 영화는 5편이 고작이라니... 심지어 어떤 영화인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영화들이 대부분인데 그런 관심 있던 영화들도 제대로 보지 않았다는 것. 요즘은 드라마도 요약본으로 본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내 이야기였다는 생각에 약간의 충격.
기자님의 글에 영업당한 작품들.
1) 꽁트가 시작된다. (2021. 일본 드라마, 닛폰 테레비)
"오랜 세월 동안 주변의 잡음에 흔들리지 않은 요령 없는 뚝심과, 한심한 일에도 많은 이의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선한 마음을 안고 버텨온 시간들. 그건 꼭 실패라고 말할 수도 없다. 어떻게 꿈이 이루어지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꿈을 접는가. 한때 내가 온 열정을 쏟았던 한 시절을 어떻게 잘 놓아주고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코끝 찡한 <꽁트가 시작된다>의 미덕은 이토록 정성스러운 포기에 있다." p.89
2) 로봇, 드림 (2024, 스페인.프랑스, 파블로 베르헤르.사라 바론(원작))
고독한 개 도그와 그가 조립하여 완성한 로봇은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바닷가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 어느 날, 작은 사건으로 잠깐 헤어졌다가 해수욕장 폐장으로 다음 시즌 개장까지 기다려야 하는 일이 생긴다. 도그와 로봇은 둘 다 다시 외롭고 고독한 시간을 견디게 되는데... 여기까지 읽었을 때, 이미 마음이 힘들었다. 둘이 다시 만나게 되는 내용이 아니라면 솔직하게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슬프잖아.
그.런.데. 둘의 재회는 없다고 말하며 리뷰를 쓴 기자님은 이것이 이 영화의 가장 특별한 지점이라고 이야기한다.
"각기 다른 공간에 남겨진 도그와 로봇은 다시 만나는 꿈을 계속해서 꿀 정도로 서로를 그리워한다. 함께 봤던 <오즈의 마법사> 속 세계를 경유해 모험을 겪기도 하고, 환한 얼굴로 서로에게 달려가 기꺼이 다시 만난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슬프게도 꿈에 불과하다. 제목이 '로봇 드림'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꿈은 다시 만나고 싶다는 도그와 로봇의 바람이 담긴 환상적인 무의식이자, 한 편의 꿈을 꾸는 것과 같은 영화적 경험의 극대화다." p.95
요즘 나는 슬픈 영상물은 보고 싶지 않다. 이야기의 주요 흐름이 아니라 곁가지의 이야기라도 감당하고 싶지 않아서 시작하지 않는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 궁금하지만 너무 궁금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보지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다음 단락에서 바로 마음을 바꾸었다.
"도그와 로봇은 서서히 새로운 인연을 만나 변화한다. 마음이 변했다기보다 그저 시간이 흐른 것이다. 도그는 공원에서 친해진 덕의 연락을 기다리며 설레고, 또 다른 반려 로봇 틴을 집에 들이기도 한다. 로봇은 자신의 몸에서 부화하고 성장하는 새들 가족을 지켜보기도 하고, 불순한 의도로 접근한 누군가로부터 몸통이 분리되는 아픔을 겪기도 한다. 다행히 그에게도 새 인연 라스칼이 찾아온다. 정성스레 로봇을 개조한 라스칼은 도그만큼 좋은 친구다.
결국 행복한 재회는 완성되지 못한다. 로봇이 우연히 도그를 발견한 어느 날, 그토록 기다렸던 만남임에도 불구하고 로봇은 도그에게 달려가는 대신 멀리서 행복을 빌어주는 것을 택한다. 도그는 로봇의 존재를 눈치채지도 못한 채로 멀어진다." p. 96
이 영화는 내가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아직 마음은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상실과 새로운 시작. 그 시절의 소중한 존재. 아직은 말끔하지 않다. 이 문제는... 현재 진행 중
이런 내용은 더욱 감정의 동요가 심해져서 보고 싶지 않은 영화인데 리뷰 보면서 그 생각이 더 견고해진 영화
1) 존 오브 인터레스트(2024, 미국, 조나단 글레이저)
"회스 부부의 모습은 독일 출신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주장한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지휘했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1961년 이스라엘 압송 재판을 취재한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실제로 저지른 악행에 비해 너무 평범한 인상의 아이히만을 보고 충격을 받은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이라 표현한다. 그는 다른 저서인 <<인간의 조건>>에서 "생각하는 힘은 인간의 다른 능력에 비해 가장 약하며, 폭정 아래서는 생각하는 일보다 행동하는 일이 훨씬 쉽다."라고도 했다. 생각이 결여된 삶. 이것이 바로 회스 부부 일상의 정체다." pp.172-173
귀한 10%의 영화 중
1)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2023, 미국, 다니엘 콴.다니엘 세이너트)
"조부 투파키가 전 우주를 뒤져가며 집요하게 애블린을 찾은 것은, 끝내 그와 연결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엄마, 나의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는 엄마, 함께 있으면 무수하게 상처받지만 그럼에도 내가 온 우주에서 진정으로 이해받고 싶은 단 한 명의 존재. 영화는 모두의 각기 다른 우주가 충돌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혼란을 이해하며 껴안으려는 노력만이 서로를 구원할 수 있다고 말한다. 유머와 친절함, 이는 혼돈의 세상을 구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p.224
이번 주말 영화 한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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