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려주고픈

기억하겠습니다.

쫌~ 2024. 9. 3. 22:04

 플래툰, 7월 4일생, 굿모닝 베트남 등의 영화로 청소년 시절 베트남 전쟁을 영화로 만났었다. 미국인의 시선으로 바라 본 베트남전쟁을 자연스럽게 만났었다. 베트남전쟁을 배경으로 한 우리 나라 영화는 알포인트, 님은 먼 곳에 정도가 기억에 남아있다. 대한민국 정부가 참전을 결정하였고 이 땅의 젊은 청춘들이 돈을 벌기 위하여, 나라의 부름에 응하여, 낯선 환경의 전쟁터로 나갔다. 이 책을 읽고 제일 처음 들었던 의문은 베트남 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들에 빠지지 않는 장면인 반전 시위 장면이 우리 나라 영화에서는 왜 볼 수 없었을까? 였다. 당시 우리 나라의 참전 군인은 적은 수가 아니었는데... 심지어 전쟁의 잔혹함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알고 있었는데... 책을 덮으며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의 상처와 잘못을 없앨 수 있는 일은 없다. 그 일은 이미 일어났던 일이고 그 일을 인정하고 바르게 바라보아야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는데... 우리는 아직 출발하지 못했다는 생각을 했다. 처참한 상황 속에서 삶을 이어나가야 했던 분들의 이야기가 너무 마음 아프고 슬펐지만 우리가 저지른 과오를 그냥 뭉개고 앉아있다는 것이 더욱 슬펐다. 

 막막했지만 명확한 참고 문헌은 있었다. 우리보다 앞서서 베트남전쟁이 어떤 전쟁이썬느지,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한국 사회에 알리고자 했던 이들이 있었다. p.41

 이 일이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니잖아. 지구 생태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일들 중에 중요하지 않은 일과 중요한 일은 누가 정하는 것일까?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일이어도 기록으로 남기고 기억한다는 것은 훗날 누군가의 이정표가 될 것이다. 홀로 가는 길은 없다. 

 나는 이야기를 들으며 전쟁이 끝난 후에도 평생 그 전쟁의 영향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했다. 저 중부 어딘가 마을에 "하늘에 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라고 적힌 증오비와 이름도 없는 어린 아이들의 죽음을 기리는 위령비와 전쟁의 흔적을 고스란히 몸으로 견뎌내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p.61
 1966년 12월 3일부터 6일까지 대한민국 해병대 청룡부대는 430명의 마을 주민을 학살했다. 여성 268명, 노인 109명, 어린이 182명. 그중 7명이 임산부였다. p.66

 그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그 날의 기억들.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이 남긴 기록으로 베트남전쟁 중 우리 나라 군인들이 민간인을 학살했던 일이 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기자가 물었다. 그때 그 학살을 저지른 참전군인이 사과를 한다면 용서하겠냐고.
 "인정을 하지 않는데 제가 어떻게 용서를 건넵니까. 잘못을 먼저 인정해야죠. 그 잘못으로 얼마나 많은 고통과 상실이 있었는지 알아야죠. 우리 인민은 늘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제가 얘기한 이 모든 것은 사실입니다."  p.111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입증해야하다니... 겪은 일을 이야기해도 그것은 진실이 아니라고 한다면... 위안부 문제를 대하는 일본 정부의 태도와 무엇이 다른걸까?

 두 피해자들의 만남. 이것이 한국 사람에게는 베트남전쟁 민간인 학살이라는 사안을 이해하는 가장 쉬운 도식인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는 이를 보고 "일본에게 사과받기 위해서는 한국이 먼저 베트남에 사과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가? 그럼 일본군의 만행이 없었더라면 한국은 먼저 사과하지 않을 것인가? 사과받기 위해서 사과해야 하는 것인가? 사과에 그런 목적과 대가가 존재할 수 있는가? p.117

 죽은 자를 추모하며 해마다 크거나 작게 제사를 챙긴다. 넉넉한 형편은 아닐지라도 돈을 마련해 죽은 가족의 묘를 새로 만들고, 비로소 마음의 큰 짐을 내려놓는 일. 소중한 이를 잃은 사람들에게 제사는 어쩌면 과거를 기억하느 ㄴ과정이면서 동시에 그 기억이 남긴 상처에서 회복되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p.168

 "32만 명이나 파병했는데 왜 반전운동이 없었어?" 
 나 역시 의문이었다. 베트남전쟁은 전 세계에 반전.평화 운동을 촉발했고, 그 흐름 속에서 종전을 맞이했다. 전쟁 트라우마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같은 용어가 사용되면서 전후 복구나 전쟁의 후유증에 대한 이야기가 베트남전쟁을 기점으로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그 시기에 우리는 무엇을 했던 것일까.
 모두가 베트남전쟁을 반전과 평화의 이름으로 기억할 때, 우리만이 경제개발과 성장의 서사로 베트남전쟁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한국의 역사적 맥락이 특수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베트남전쟁 이후로 한국이 경제성장을 했고 그 배경에 미국의 지원이 있었다고 말하자,. 외국 프로듀서는 그때서야 이해가 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이나 제대로 된 논의가 왜 이뤄지지 않은지도 알겠다는 그의 말에 "왜 그런 것 같은데?"하고 되물었다. 그는 쿨하게 답했다. 
 "너희는 미국이 아니잖아."
 그의 말은 오래도록 뇌리에 남았다.  p.188

 그는 편집 감독과 일해보기를 권했다.
 "무엇이든 다 장단점이 있어요. 물론 이 영화를 기획하고 쭉 여기까지 끌어온 감독이 프로젝트에 대해 제일 잘 알고 있겟죠. 그게 문제예요. 감독은 이 컷을 보면 이게 어떤 상황에서 촬영된 건지, 이 인물이 누군지, 지나가는 건물이 무엇인지 매우 잘 알고 있죠. 그런데 관객은 몰라요. 이 인물도, 건물도, 상황도 말이에요. 그래서 편집자가 필요한 거예요. 감독도, 프로듀서도 아닌 제3의 시선에서 볼 수 있는 사람. 편집자가 일종의 첫 번째 관객이 되는 셈이죠. 그 새로운 눈으로 영화의 내러티브를 잡아내는 거예요."  p.191

 지금 우리 아이들 세대가 베트남전쟁을 바라보는 제3의 시선이 될 수 있다. 찝찝하게 앉아서 뭉개고 있는 이 상황에서 일어나서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는 내러티브를 만들어가려면 과오에 대한 인정과 용서와 청산이라는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실제로 학살의 구체적인 내용과 경과, 피해자의 신상과 규모는 여전히 미궁 속에 있다. 제대로 된 진상규명도 없고 그렇기에 공식적인 사과와 배상. 보상의 절차도 없는 상황 속에서, 직접 당사자가 아닌 가해국에 속했을 뿐인, 사건과 무관한 사람들이 사죄를 하는 것이 마을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일지 궁금했다.  p.198

 광주 사태도 자국에서 일어난 군인들에 의한 민간인 학살(학살이라고 표현하고 싶지 않은 것은 너무 나이브한 태도일까?)사건이 아닌가. 이 일도 얼마나 오래 뭉개로 앉아 있었던가.

 '자유월남'이 '베트남'이 되고 '참전용사'가 '참전군인'으로 바뀌는 동안, '반공'이 국시였던 시절에서 6.25전쟁의 '적국'이었던 중국으로 자유여행을 가는 시절로 변화하는 동안, 베트남전쟁에 대한 논의는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베트남전쟁은 여전히 경부고속도로를 만들어준 경제성장의 원동력일 뿐이었다. 전쟁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전쟁에서 돌아온 사람들의 삶은 어땠는지, 우리에게 그 시간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논의가 부재했기 때문에, 그리고 전쟁이 근본적으로 삶에 무엇을 남겼는지 돌아보는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피해자는 피해자대로 가해국인 우리는 우리대로 비극이 계속되고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p.207

 객석의 누구도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았다. 여러 차례 한국을 방문하며 그가 꼭 받고 싶었던 건 사과였다. 손을 잡고 참회하는 참전군인으로부터의 진심 어린 사과. 그걸 요구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주머니는 어떠한 사과도 받지 못했다. p.213

 어떤 관객은 물었습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하면 되냐고, 정확한 해결 방식은 뭐냐고. 명확하고 확실한 해결 방안은, 기억의 방식은 없습니다. 다만 그 얼굴을 마주하는 것, 그 얼굴에 응답하는 것, 그 얼굴이 말하고자 했을 때 마음을 다해 듣고 기억하고 전달하는 것, 그것이 제가 탄 아주머니의 얼굴을 마주하며 배운 것입니다.  p.2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