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순정만화
나의 편견에 부끄러웠던 순간. 5번째 아무튼 시리즈인데 가장 빨리 읽은 책. 너무 재미있었다. 이렇게 재미있는 책을 표지 그림만 보고 패쓰했었다. 작가는 (동의할지 모르겠지만) 페미니스트이다. 놀랄 일이 아닌데 순정만화와 페미니즘을 어울리지 않다고 잠깐이나마 생각했던 썩은 편견을 가진 사람이었다니...
어린 시절 집에는 아빠가 사들고 오신 둘리 단행본이 있었고, 가끔 엄마가 보물섬을 사주셨다. 곰곰 돌이켜 생각해보면 만화책에 대해 부모님은 허용적이셨던 것 같다. 그렇다면 만화책을 멀리했던 이유는 뭐였을까? 만화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하기에는 이 책에서 언급되는 만화 중에 보지 않은 만화가 없으니... 좋아했다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본격적으로 만화책을 보기 시작했던 시기는 대학생이 되면서였다. 지금도 나의 책장에는 만화책이 꽤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학창 시절 선생님들의 이야기에 영향을 크게 받았나보다. 만화책은 좋지 않다는 묘한 편견(정말 편견 덩어리네. 심지어 후진 편견)을 비판없이 수용하다니. 그다지 순종적인 모범생도 아니었는데...
끊임없이 책이 증식하는 환경에서 살아온 사람이라면 알 거라고 믿는다. 아무렇게나 꽂힌 것 같은 책들 사이에도 주인은 알아볼 수 있는 규칙이 존재하며 혼란 속에서도 항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책들이 있다는 것을. p.8 공감 공감 백개의 공감
이 학원물을 지배하는 가장 큰 정서를 꼽자면 관계에 대한 열망일 것이다. 누군가와 강렬하게 가까워지고 싶고, 그가 가진 재능이나 매력을 동경하고, 그에게 나 역시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고, 그 사람만이 나의 막연한 공허와 물음표들에 해답이 되어줄 것만 같은 청소년기의 간절한 열망. p.16 [쿨핫]에 대한 작가의 시선 중
지금 익숙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두 사람의 관계는 완벽한 걸크러시, 완벽한 시스터후드다. ... 박부옥과 송명자 두 사람이 마주보고 있는 만화 원고지 위로, 이런 멘트가 곁들여졌다. "이 표지 그릴 때 아직도 생각나요. 그래, 이 만화는 여자 둘로 시작하는 거야. 멋진 여자 둘로" 순정만화를 다시 펼치면 그때는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다양한 여성 캐릭터들의 면면이 새롭게 보일지도 모른다. 우리조차 잊고 있었던, 그때는 그 특별한 반짝임을 알아채지 못했던 수많은 여자들의 이야기가. p.55 [오디션]의 천계영을 이야기하며... 매드맥스의 이야기까지 열변(글자가 볼드체로 보인 것은 나의 착각일까?)을 토하는 작가
내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제도가 보장하지 않은 관계, 그 지속 가능성에 대한 확신일 것이다. 각자의 개인적인 삶에 대해서는 더할 나위 없이 친밀하게 일상을 나누고 무슨 일이 생기면 두 팔 걷고 나서는 의리는 있으면서도 그게 각자 주변의 다른 관계로는 확장되지 않는 사이. 소위 결혼 적령기나 연인에서 부부로 호칭이 바뀌는 시기를 넘긴 두 성인이 앞으로는 함께 어떤 방식이나 규칙을 만들어갈 수 있을지, 은근 기대도 된다. p.86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자들의 우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 주인공이 사랑을 찾아가는 과정만큼이나 옆에 있는 다른 여자 캐릭터들의 관계도 중요하다. 그리고 이들은 주인공이 성장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친다. pp.117-119
어떤 상대방을 향해 호기심과 애정을 가지는 것. 그런 다정함을 잃지 않고 앞으로 계속 나아가고 싶다. p.123
우정에 대하여...여자들의 우정.(왜 우정을 이야기할 때, 여자들의 우정은 뭔가 특별한 것처럼 이야기할까? 이런 표현도 싫다. 남자나 여자나 우정을 소중하게 가꾸는 부류도 있고 아닌 부류도 있는데... 우정, 의리 뭐 이딴 수식어는 남자들에게는 너무 쉽게 붙여준다. 지랄도) 가시화의 중요성에 대하여
그나저나 최근에 만화책들을 다시 보며 새삼 깨달은 것이 있다. 바로 순정만화가들은 일찌감치 고양이의 매력을 깨달은 종족이라는 사실이다. p.160
놀랍게도 요즘 재미있게 읽은 책의 작가님들은 모두 고양이를 모시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소름!
세상의 모든 생명체들이 한낱 인간 나부랭이들에게 위협받으며 두려움 속에 살아가지 않게 되기를. 길친구들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에 측은지심이 자리잡기를... 우리 망나니들 재미나게 지내자!
아무튼, 문구
나는 문구인이다. 하지만 이 책의 작가와는 행보가 전혀 다르다. 작가는 어린 시절부터 문구인의 길을 차근차근 걸어왔다면 나는 직장인이 되어 이런 저런 종이들을 접하면서(그 당시 나는 두성종이에 취직하고 싶어했다. 몹시도) 문구인이 되었다.
소비 예찬론자인 나는 새 물건이 가져다주는 에너지의 힘을 신봉한다. 좋은 아이템이 장착되면 잘 싸우는 게임 캐릭터처럼 나도 새 문구를 살 때마다 일주일치 에너지가 솟아나기도 하고, 열정이 끓어올라 새 취미를 만들기도 하고, 심지어 평소에 하지 않던 행동을 하기도 한다. 마음에 드는 사인펜을 발견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든지, 예쁜 노트를 매일 가지고 다니려고 일기를 쓴다든지 하는 식으로 살아왔다. 그러니까 문방구는 내게 소모품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무언가를 시작하는 불씨가 되기도 하고, 작업의 훌륭한 조력자가 되기도 하고, 나의 취향을 대변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p.101
그렇게 막연히 좋아했던 것에 대해 왜 좋은지 계속해서 고민하고 파헤치다 보니 점점 생각이 뾰족해졌고, 더 정확하게 알고 싶어 깊이 찾아보다 보니 새로이 알게 되는 잔지식도 하나둘씩 늘었다. p.152
2001년 첫 직장 생활에서 내가 알던 종이의 세계는 무너졌다. 색과 두께, 크기로만 구분하던 종이 무지렁이는 엄청난 종이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내가 살던 지역의 대형 문구점의 종이 코너를 확인하는 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서울로 원정 쇼핑도 다녀오고... 두성종이라는 회사를 알게 되면서 그 회사에 취직도 하고 싶었다. 종이 덕질의 정점이었던 2007년 여름. 다이어리를 제작했다. (다이어리를 쓰지 않는 1인. 내가 좋아하는 것은 체크리스트 작성이며, 다.꾸.는 더욱 좋아하지 않지만) 일러스트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내지를 디자인하고, 제본 방법을 배우기 위해 꽤 긴 시간동안 연수를 받았다. 내지를 인쇄해야 하던 순간. 어떤 종이에 인쇄하느냐에 따라 화면으로 확인했던 내지가 같은 디자인임에도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멋진 순간이었고 그 해 여름 방학 내내 종이 찾아 삼만리였다.
필기구를 대하는 나의 포지션은 학창 시절 내내 필기구가 뭐가 중요해였다. 초등학생때는 저녁마다 아빠와 함께 연필을 깎는 시간을 좋아했다. 어느 날 혼자 칼로 연필을 깎으면서 뭔가 어른같은 기분에 우쭐했었다. 그 날의 기분이 지금까지 어떤 칼을 사용해도 연필깎이처럼 연필을 깎을 수 있는 나를 만들어주었다. 자연스럽게 필기구에 대한 관심은 유일하게 연필에만 쏠렸다. 중고등학교 시절 친구들의 형형색색 노트를 보면서도 큰 감흥없이 연필과 모나미 흑색 볼펜으로 10년(대학까지)을 보냈다. 어느 순간 종이와 궁합을 따지게 되는 필기구들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다양한 필기구의 세계에서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 뭔가 관심을 갖게 되는 시기와 계기가 일반적이지는 않은 듯 하지만(만년필에 대한 관심도 잉크에서 시작) 구매력을 갖추게 된 시기부터 문구인의 길을 걷게 되어 다행이라 생각한다.
나에게도 문구함(?)이 있다. 문구함에 들어 앉은 문구들을 보면 (고유명사가 생각나지 않아 그 고유명사를 설명하고 대화를 이어나가야 하는 뇌상태) 기억이 생생하다. 그 문구들과 얽혀 있는 나의 이야기. 나의 문구 쟁여두기는 이야기 수집의 방편이다. 이야기가 가득 담긴 문구함. 그렇다면 기록으로 이어져야할테지만 뭔가를 남겨두는 것은 아직도 무섭고 싫다. 문구인이라면 기록인이지라는 흐름에 반하는 1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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