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려주고픈

가마쿠라 홍보 대사... 츠바키 문구점

쫌~ 2024. 5. 9. 22:39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기 시작했는데 다 읽기도 전에 주문 완. 아름다운 소설이다. 책표지의 색과 은박이 눈길을 끌었는데 내용은 더욱 아름다운 책. 
 꽤 오랫동안 들여다보지 않았던 문구 보관함을 열어 보았고, 가마쿠라 여행 계획(칠복신 순례!! 이거 꼭 해보리라)을 세웠다. 좋아하는 필기구와 종이를 꺼내 책상 앞에 앉아 끄적여보았다. 편지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하다고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나보다. (편지는 쓰지 않았으니) 아! 일본어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이야기는 가마쿠라에 위치한 츠바키 문구점에서 선대(이야기의 말미에서야 할머니라고 부른다.)가 물려준 대필업을 하게 되는 포포(아메미야 하토코)의 이야기. 선대의 엄한 교육으로 일본의 세시풍속과 전통 예절에 대해 해박한 포포의 멋진 모습을 이야기 내내 볼 수 있다. 마음을 나누는 이웃 친구 바바라 부인과 큐피등과 함께 보내는 일상은 가마쿠라(실명을 써서 검색이 가능)를 매우 매력적인 장소로 만들어준다. 대필 사연에서 엿보이는 여러 마음들과 사연을 대하는 자세. 대필을 의뢰한 의뢰인과 의뢰 내용을 품을 수 있는 필기구를 고르고, 내용을 담을 종이를 고른다. 편지의 내용을 어떤 글씨체와 글자로 풀지(히라가나를 사용할지, 한자를 사용할지, 한자도 격식을 갖추어서 쓸지 등)... 다 쓴 편지를 넣는 봉투를 고르는 작업과 어떤 우표를 사용할지. 무엇하나 멋지지 않은 것이 없는 이야기다. 얼마나 매력적인지!!!! 

첫 대필. 조문 편지. 곤노스케 군의 정체를 알았을 때, 이 이야기에 더욱 매료되었다. 아이들에게 편지를 가르칠 때, 형식에 맞추어서 가르친다. 마음이 충분히 동하지 않은 상태에서 쓰는 편지이니 대부분 내용이 빈약하다. (40분 수업에서 마음을 담은 편지를 작성하게 한다는 것이 처음부터 좀 말이 안되는 부분이지만) 그러다보니 형식보다는 내용에 더 중점을 두게 되는데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형식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어떤 일에서 형식으로 자리 잡은 것들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인데... 그 의미를 되새겨 볼 생각조차 안했다. 

 그리고 조문 편지를 쓸 때 주의 사항은 '자주, 다시, 거듭, 되풀이해서' 같은 불경스러운 단어를 쓰면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죽음이 거듭해서 찾아오는 것을 꺼린다는 의미로 추신도 달지 않는다. 이름 옆에 호칭도 붙이지 않고 맺음말 역시 쓰지 않아도 된다. 
 나는 조용히 붓을 들었다.
 눈물샘을 자석 삼아 온 세상의 슬픔이란 슬픔을 모두 빨아들였다. 그 속에는 어린 시절 길렀던 금붕어가 죽었을 때의 슬픔과 스시코 아주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의 슬픔도 포함됐다. p.35
 조문 편지는 평소보다 훨씬 연한 색의 먹으로 쓴다. 
 먹색을 옆게 하는 것은 슬픈 나머지 벼루에 눈물이 떨어져 옅어졌다는 의미다.  p.36

 이혼 보고라니. 청첩장도 아니고.. 가만 생각해보니 청첩장보다 더 필요한 것이 이혼 보고 아닐까? 추측전국시대의 주인공이 되지 않으려면

 받는 사람 이름도 가로쓰기여서 붓이 아니라 만년필로 쓰기로 했다. 잉크는 에르방사의 트래디셔널 잉크로 30색이나 되는 색 중에서 그리뉘아즈를 골랐다. 프랑스어로 '재색 구름'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시험 삼아 코튼 종이에 써보니 잉크색이 너무 연해서 마치 조문 편지 같앗다. 잉크색이 진해지도록 밤새 병뚜껑을 열어서 수분을 증발시켰다. 프랑스제 밀폐 용기에 제습제를 넣어두면 더 빨리 증발시킬 수 있다. 
 수분이 빠져서 진해진 잉크는 코튼 종이와 궁합이 좋아서, 결과적으로는 품위 있고 청초ㅗ하게 마무리됐다. 재색 잉크로 이쪽의 조심스러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하지만 절대 슬픈 색은 아니다. 구름 너머에는 분명 파란 하늘이 펼쳐져 있을 것이다. p.64

It's my style!

 내 경우, 어떤 식으로 편지를 쓸지 이미지가 어렴풋이 떠오르면 필기구를 정하는 작업부터 시작한다. 같은 글을 써도 볼펜과 만년필고ㅘ 붓펜과 붓은 느낌이 전혀 다르다. 기본적으로 연필로 편지를 쓰는 것은 실례여서 연필은 선택 사항에 들어가지 않는다. 
 생각 끝에 사쿠라 씨에게 보내는 편지는 우리펜으로 쓰기로 했다. 소노다 씨의 그 투명하도록 선한 마음을 전하는 데 유리펜이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이 편지를 소노다 씨가 사쿠라 씨에게 보내는 작은 선물이 되게 하고 싶었다. p.90
 종이는 유리펜과의 궁합을 생각하여 표면이 매끄러운 것을 골랐다. ... 그래서 고른 것이 벨기에 제품인 크림레이드 페이퍼로, ... p.91
 크기는 엽서 크기로 했다. 여러 장의 편지를 쓰면 사쿠라 씨가 무겁게 느낄 테고, 그렇다고 엽서를 그댈 ㅗ보내면 제 3자가 보게 된다. 소노다 씨의 마음은 그렇게 가볍지 않을 것이다. p.91

나만의 의식. 아무도 모르지만 의식을 행하게 되면 의식의 기운이 묻어난다. 사람에게 뿜어져 나오는 오라의 색이 그 날의 기운 타입?? 거절 편지를 쓸 때, 사용한 '마스야'의 원고지. 궁금증 폭발!

 집에 도착하자마자 샤워를 하고, 취기를 깨우기 위해 진하게 끓인 녹차를 마신 뒤, 얼른 책상 앞에 앉았다. 거절 편지는 쓰는 사람의 기세도 중요하다. 몇 번이나 초안을 쓰며 생각을 거듭하는 편지가 있는가 하면, 이런 식으로 단번에 술술 쓰는 편지도 있다.  p.112

인정하기. 내가 믿고 있는 것들을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나의 생각이 변했음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 글씨가 그 사람을 나타낸다는 포포의 생각이 바뀌게 되는 순간. 그 의뢰인을 위해 선택한 이토야의 로메오 볼펜.

 모양이 가지런한 것만이 아름다운 글씨는 아니다. 온기가 있고, 미소가 있고, 편안함이 있고, 차분함이 있는 글씨. 이런 글씨를 나는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p.146
 요컨대 글씨를 쓰는 행위는 생리 현상과 같다. 자신의 의지로 아무리 예쁘게 쓰려고 해도, 흐트러질 때는 어떻게 해도 흐트러진다. 몸부림치고 뒹굴며 아무리 칠전팔기를 해도 써지지 않을 때는 쓸 수 없다. 그것이 글씨라는 괴물이다. 
 그때, 문득 귓가에 선대의 목소리가 들렸다.
 글씨는 몸으로 쓰는 거야.  pp.147-148
그러나 여기에는 그에게서 태어난 그의 말이 쓰여 있다. p.154
오늘만큼은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글씨를 쓴다. 대필가는 다양한 사람의 마음과 몸이 되어 글씨를 쓴다. 자화자찬을 하긴 그렇지만, 다양한 사람의 글씨로 빙의하는 것도 이제 곧잘 한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생각해보니 나는 나 자신의 글씨를 아직 몰랐다. 마치 내 몸을 흐르는 피처럼 나 자체인 듯한, 어디를 잘라도 내 DNA가 넘쳐날 듯한. 그런 자신의 분신 같은 글씨를 만나지 못했다.  pp.165-166
슬럼프는 변비의 고통과 비슷하다. 배설하고 싶은데 나오지 않는다. 배설할 것은 있는데 쉽게 나오지 않는다. 분하고 비참하다.  p.183

절연. 인연을 끊어버리다. 관계는 함께 가꾸어 온 것이지만 그 관계의 시작인 연은 운명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사람의 의지가 들어있지 않은. 관계라는 것은 운명과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것을 끊어내려면 얼마나 단단한 마음이어야 할까

 익명 씨가 새삼스럽게 머리를 숙였다. 아마 마음 한 켠을 얼버무리면 그대로도 관계를 계속 이어갈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익명 씨는 그렇게 얼버무려서 이어지는 관계가 옳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다. 겉치례로 관계를 지속해도 더는 서로에게 좋은 일이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절교하지 않으면 끊을 수 없을 만큼, 사이가 좋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런 상대를 평생에 한 사람이든 두 사람이든 만난 것만으로도 기적이다. p.248
 오늘 익명 씨와 나눈 얘기에서 익명 씨의 깊은 애정을 느꼈다. 익명 씨의 마음속에서 두 개의 상반된 감정이 서로 정면으로 부딪치고 있음을 느꼈다. 
 두 사람을 강하게 묶어두었던 우정이라는 이름의 끈. 그것을 익명 씨 쪽에서 끊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익숙하고 타성에 젖은 관계가 계속된다. 상대를 자유롭게 해주기 위한 절연장이구나 하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상반되는 마음을, 거울 글씨로 전하고 싶었다.  p.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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