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려주고픈

80억명 중 단 한 사람을 구할 수 있습니다. 축복일까요?

쫌~ 2024. 9. 8. 14:55

 출간되는 책마다 이름이 적혀있다면 사고 보는 작가님이 있다. 구의 증명으로 처음 만났던 최진영 작가님이 내겐 그런 작가님이다. 희망의 한 자락도 남기지 않는 이야기 속에서 그럼에도를 찾게 되는 작품들. 이 책은 달랐다. 우리는 각자의 신념과 방식으로 신을 만나고 희망을 잡고 있다. 나약한 두 손을 가졌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불확실성 속에서도 각자의 노력을 놓지 않는다. 단 한 사람. 내가 이름붙인 단 한 사람.

 임천자의 기적, 장미수의 악마, 신목화의 목표인 신은 무엇인가.
 
 둘이었다가 하나가 된 나무.
 부활한 나무.
 시간을 초월한 생명.
 무성한 생에서 나뭇잎 한 장만큼의 시간을 떼어 죽어가는 인간을 되살리는 존재.  p. 79

 처음에는 그저 듣던 목수가 어느 날부터 목화의 말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기록이 중요하다고 목수는 말했다. 경험이 쌓이면 어떤 패턴을 찾을지도 몰라. 패턴을 알면 그다음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거야.  p.85

 기온과 습도에 따라 눈의 결정은 결정된다. 똑같은 결정은 없다. 각각 다른 눈송이는 결국 녹아 사라진다. 무미건조한 사실에 불과한데도 생각할수록 감정이 섞였다. 왜 모두 다를까. 다른 삶을 살다가 결국 죽을까. 생명은 어째서 태어날까. 탄생이 없다면 두려워할 죽음도 없을 텐데.  p.88

 목화가 목수에게 물었다.
 중개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 뭔지 알아?
 목수는 짐작하여 대답했다.
 글쎄, 살려달라는 말?
 목화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면 대답했다.
 사랑한다는 말.
 그날 목수는 그 말을 기록했다.   P.89

 다음 날부터 임천자는 매일 새벽 맑은 물을 떠 놓고 깨끗한 정신으로 기도했다. 자기가 살아나던 순간 죽었을 존재들을 위해서.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자기가 깨들은 것을 장미수에게 말하지 않았다. 언젠가 장미수 스스로 깨닫기를 기다렸다. 깨닫지 못한다면 그 또한 장미수의 운명이라 믿으면서. 그러나 장미수에게는 '왜 나인가'에 대한 답이 이미 있었다. '임천자의 자식이니까' 이상의 답은 필요 없었다. 신목화에게 '왜 나인가'란 질문은 중요하지 않았다.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닌 것처럼 이미 주어진 운명이었다. 신목화에게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내 운명에 내 몫이 있음을, 내 의지가 개입할 수 있음을, 내 삶의 주인은 나임을 증명하는 것.  p.102/166

 모두 자기만의 삶을 산다. 상대의 삶이 어떤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도 다들 너무 쉽게 판단하지. 불행할 거라고, 행복할 거라고, 보족한게 뭐냐고, 부족한 것투성이라고. 루나에게 왜 약을 먹었느냐고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사그라들었다.  p.124/166

 오직 사람만이 다른 생명을 위해 기도한다. 신을 필요로 한다. 기적을 바란다. 먼저 떠난 존재가 너무 그리워 죽음 이후를 상상하고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만약 신이 나타나 목화에게 우주의 기원을 알려준다면, 하지만 그것을 인간의 과학으로, 이를테면 슈뢰딩거 방정식이나 하이젠베르크의 행렬 역학을 사용하여 설명한다면 목화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신이 나타나 스토리텔링으로, 이를테면 신화 같은 방식으로 우주의 기원을 설명한다면 목화는 신뢰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신이 나타나 신금화에 대해서 말한다면 그 어떤 말이라도 목화는 믿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이 자진한 것이 아니라 목화의 기도가 신을 호출했으므로. 무슨 말이든 기꺼이 믿을 맏음이 목화에게는 준비되어 있으니까.  p.132/166

 어쩌면 그저 알려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너를 보고 있다고. 생명체라는 전체가 아니라, 인류라는 종이 아니라 오직 너라는 한 존재를 바라보고 있다고. ...
 임천자의 단 한 명은 기적,
 장미수의 단 한명은 겨우.
 신목화의 단 한명은, 단 한 사람.  
 한 사람을 살리는 일이었다.  pp.147-148/166

 상실 앞에서 슬픔은 마땅했다. 그것을 너무 오랫동안 미뤄왔다.  p.149/166

 모두 다르다. 각자의 신이 있는 것이다. ... 루나의 마음에는 루나의 신이 있다. 그리고 나갈 길 또한 있다. 목화는 루나의 말을 긍정하며 들었다. 그것이 지금부터 시작될 목화의 일이었다.  p.160/166

  키 큰 나무들이 순서 없이 뽑히거나 부러졌다. 태양 빛을 선점하여 더 빨리 더 높게 자라던 나무들은 그들이 누렸던것만큼 비바람에 취약했다. 키 큰 나무의 그늘 속에서 천천히 자라던 나무들은 평소에 누리지 못한 만큼 보호받았다. 태풍이 몰고 온 온갖 위협 속에서 두 나무는 서로 뿌리를 움켜잡고 가지를 끌어안으며 다짐했다.  p.14

 책의 앞 부분에 있는 나무 이야기. 마음에 가장 큰 울림을 준 장이다. 올 여름 유난히 더웠고 비가 이상하게 내렸다. 천둥 번개도 유난히 심했다. 아마 내년에는 또 다른 기록이 생길것이다. 지구 생태계의 평형은 인간의 이기심에 의해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고 그럼에도 인간은 멈추지 않는다. 

 일화가 다다르고 싶은 자리에는 늘 남자가 있었다. 신문에서도 뉴스에서도 가끔 보는 드라마와 영화와 다큐멘터리에서도 1등은, 리더는, 전문가는, 박사님과 해결사는, 책임자와 대표는, 공로자는, 피라미드 꼭대기에는 남자가 있었다. 일화는 오태수를 떠올렸다. 그때 선생들은 일화와 태수를 비교한 것이 아니었다. 여자와 남자를 비교했다. 기회는 당연히 태수에게 더 많이 주어질 것이다. 세상이 그 자리의 남자를 원하니까. 일화는 이기적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이명기는 이기적일 필요가 없었다. 부족한 것은 규형 잡힌 식단 따위가 아니었다. 포박되었다는 느낌은 거짓이 아니었다. 일화의 라이벌은 이 세상 전부였다. 일화는 그것에 포함되어 포위된 채 싸워야 했다.  p.33

 사람들의 예상과 다르게 월화는 언제나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었다. 월화는 마음을 거리낌 없이 표현했다. 유리잔이 사랑을 담는 그릇이라면 사랑을 전하기 위해 잔이 넘치도록 콸콸콸콸 쏟아붓는 대신 유리잔을 깨고 사랑의 상식을 없애버리는 사람. 월화의 사랑 표현은 종잡을 수 없었다. 외면과 집착, 증오와 헌신, 질투와 찬사, 무조건적인 지지와 의심이 공존했다. 월화의 사랑은 상대에게 환희를 선사했으며 그것은 금세 환멸로 바뀌곤 했다. 월화는 사랑을 주었는데 상대는 경멸로 받았다. 월화는 사랑을 주었는데 상대는 권태로 받았다. 월화는 사랑을 주었는데 상대는 기만으로 받았다. 맹세코 월화에게 그것은 언제나 사랑이었다. 워로하에게 꿈이 있다면 한 사람을 오랫동안 변치 않고 사랑하는 것. 그런 면에서 월화의 라이벌은 자기 자신이었다. 연애와 사랑에서 월화는 이기는 방법을 몰랐다.  p.34

 금화가 사라진 자리에는 죄책감이 고였다. 가족들은 저마다 죄책감을 껴안고 살았다. 그때 내가 그러지 않았다면. 그때 내가 이렇게 했다면. 가능했을 일을 헤아릴수록 죄책감도 커졌다. 그러나 일어난 일은 단 하나였다. 금화가 사라졌다는 것. 죽없다고 말할 수조차 없다는 것. 그것은 또 다른 질문을 불러왔다. 어딘가에 살아 있을 수도 있잖아? 아무리 섣불리 그 말을 꺼내지 않았다. 질문은 질문을 불러올 테니까. 어디에? 어떻게? 그런데 왜 나타나지 않지? 모든 질문이 고통이었다.  p.45

 더 많은 사람을 구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미수는 매번 단 한 사람만 구할 수 있었다.  P.61

  신금화가 사라진 이후 미수는 소환될 때마다 절절매며 신에게 빌었다. 내 딸을 찾아달라고. 생사라도 알려달라고. 시신이라도 거두게 도와달라고. 제발 내 딸을 불쌍히 여겨 보살펴 달라고. 내가 여태 빠져 살던 지옥의 대가가 내 딸의 생존이라면 나는 죽을 때까지 기꺼이 감당하겠다고. 응답은 없었다. 신은 부당했다. 악의 없이 잔인했다. 장미수에게 신은 전능에 도취한 존재에 불과했다. 복종은 당연하며 자기 말을 따르지 않으면 벌을 내리는 독재자. 장미수는 때로 저항하듯 사람을 구하지 앟았다. 끔찍한 두통을 선택했다.  p.78

 천자에게 두려움이, 미수에게 사랑이 있었다면 목화에게는 질문이 있다. 미수는 천자와 달리 경험과 깨달음을 목화에게 상세하게 알려주었다. 목화는 몇 차레 소환을 겪으며 엄마와 자신의 경우를 비교했다. 엄마는 지시하는 자를 '신'이라고 했다. 
 왜 신이라고 해?
 그 터무니없는 것을 신이 아니면 뭐라고 부르겠니.  p.82

 중개인이라고 정의했다. 나무와 사람 사이의 중개. 나무가 사람을 살리려고 해도 목화 없이는 살릴 수 없다는 점이 중요했다. 목화는 자기 몫을 잊지 않으려고 했다. 그렇게 건조하고 냉정하게 생각하려고 아무리 애써도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고통이었다.  p.85

 무슨 일을 하게 되든 힘들 거야. 사람들의 이해를 구하기도 어렵겠지. 그러나 네가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하지는 마. 말할 수 없는 비밀은 누구에게나 있어. 남들은 하지 않는 일을 네가 하는 건 사실이지. 하지만 누가 알겠니. 네가 하지 않는 일을 또 누군가가 하고 있을지. 조언은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삶이 이렇다 저렇다 말을 들어도 자기 삶을 살아내는 사람은 목화뿐이었다. 살아봐야 알 수 있었다. 살아본 뒤 깨달을 진실이 부디 엄마와 같은 애용은 아니기를 목화는 바랐다.  p.69/166 

 그분은 어디에 있는가. 무엇을 보고 있는가. 언젠가 목화는 임천자의 혼잣말을 들었다. 신을 찾는 사람은 자기 속부터 들여다봐야 해. 거기 짐승이 있는지, 연꽃이 있는지. 언젠가 목화는 장미수의 혼잣말을 들었다. 기도로 구할 수 있는 건 감사하다는 말뿐이지. 나머지는 다 인간 몫이야. ... 신은 그들에게 관심이 있는가?  p.89/166

 어떤 사랑은 끝난 뒤에야 사랑이 아니었음을 안다. 
 어떤 사랑은 끝이 없어서 사랑이란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어떤 사랑은 너무 멀리 있어 끝이 없다.
 어떤 사랑은 너무 가까이 있어 시작이 없다.  p.97/166

 신목수. 우리가 하는 일이 그거야. 한 사람이 살 때 다른 사람은 죽어. 신이 우리에게 기회를 줬다고? 그럼 그때 죽은 다른 사람들은? 신이 자기를 보살핀다는 생각만큼 순진하고 이기적인 건 없어. 산 사람이나 삶을 축복이라고 여기는 거야. 신의 옹졸한 차별을 은총이라 부르면서.  p.115/166

 그런 일을 하지 않아도 무섭고 피곤하잖아. 화가 나고, 힘들고, 포기하고 그렇잖아. 근데 사람이라도 구할 수 있으면 의미가 있는 거잖아. p.124/166

 임천자는 장미수가 엄마를 계속 원망하고 미워하길 바랐다. 장미수에게는 그런 존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승에서도 저승에서도 자신은 기꺼이 그 역할을 맡을 수 있었다. 아주 오랜 후에야 장미수가 깨닫게 될 임천자의 사랑이었다.  p.146/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