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려주고픈

나도 쓰는 여자

쫌~ 2024. 11. 7. 13:11

이고 싶은 큰 바람이 있다.

 제목에 홀려서 대출하려다가 표지에서 멈칫(개인취향이 아닐 뿐 전혀 이상한 표지는 아님)했는데 출판사를 보고 멈칫한 마음이 싹 사라졌다. 

 이 책은 여성의 삶과 작가의 삶에 대하여 현재를 살고 있는 일단 등단은 한 작가 은섬과 조선 시대를 살고 있는 중숙과 그녀의 딸인 작희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초반에 글 못 쓰게 붙어 있는 귀신 퇴마라는 솔깃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퇴마의 과정을 보면 세상 모든 프리랜서들에게 필요한 과정이 아닐까? ㅎㅎㅎㅎ 

 성별에 따라 삶이 결정된다. 간혹 시대적 패러다임에 따라 변화의 움직임이 보이지만 성별에 따른 차별은 여전히 존재한다. 조금씩은 달라지지 않을까? 라는 기대를 저버리지는 않았지만 살아 생전 혁신적인 변화를 보게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가부장제를 지탱하고 이끌어 온 주역은 아들을 가진 여성이니... 중숙의 시어머니처럼 이들의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해야 새로운 사회적 시스템이 자리하지 않을까?

 중숙은 신유년 겨울 흰 눈이 탐스럽게 쏟아지는 날 작희를 낳았다. 시어머니가 자신의 딸에게 아무렇게나 말성이라는 이름을 지어줬지만 중숙은 딸에게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사람은 그 애를 잉태하여 열 달을 품고 살과 숨을 준 자신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作囍.
 중숙은 고심 끝에 지을 '작'과 쌍 '희'자를 찾았다. 딸아이가 이야기를 지으며 기쁘게 살았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p.28

 3남 1녀의 사랑스러운 고명딸. 중숙. 어려서부터 호기심 많고 영특했던 중숙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전폭적인 지지로 자신의 욕망을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난다. 아무리 남다르고 의식이 깨어있던 아버지였지만 시대의 틀을 깨지는 못한다. 너무 소중했기에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준비하는 아버지는 그 사랑으로 중숙을 시대의 틀 안에 가두게 된다. 캄캄하고 낯설지만 나의 욕망을 위해 가장 소중한 안전장치마저 끊을 수 있어야 나의 욕망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일까? 여튼 중숙의 아버지가 고심끝에 고른 사돈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 모든 아들이 아버지를 닮지는 않으니... 중숙의 남편은 개였다.

  내 어머니 김중숙 씨는 어떤 마음으로 글을 썼을까.
  어머니는 이야기를 끝내고 싶었을 텐데.
  나는 계속 쓸 것이다.

 나는 작희의 일기에서 해독하듯 찾아낸 이 세 문장을 떠올렸다. 그때, 경은이 내 옆으로 와서 나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작희는 뭐 하던 여자야?"
 "쓰는 여자였어."
 "쓰는?"
 "응, 글 쓰는."
 경은이 오른손으로 연필 쥐는 모양을 해 보였다.
 "응, 이야기를 썼더라고."
 "아, 쓰는 여자라니. 막 동질감이 생기려 하네."   pp.62-63

 우연하게 은섬에 손에 들어 온 작희의 일기. 우연은 아니었다.
 은섬과 작업실을 공유하는 작가들에 의하여 시작 된 주 5일 단위로 99일간 진행되는 퇴마 의식!!

 -일정한 시간에 일어난다.
 -삼십 분 이상 걷는다.
 -단.탄.지 비율에 맞춘 약 오백 칼로리 이내의 아침식사를 한다.
 -오전 여덟시 오십분까지 작업실에 입실한다.
 -아홉시에 글쓰기를 시작한다.
 -작업중 휴대폰은 무음으로 둔다.
 -열두시에 단.탄.지 비율에 맞춘 칠백 칼로리 이내의 점심식사를 한다.
 -두시부터 여섯시까지 오후 글쓰기를 한다.
 -여섯시에 작업실에서 퇴실한다.   pp.65-66

 퇴마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퇴마사가 작업실에 홈캠을 달아서 확인하고 제대로 지켜지지 않으면 알려준다. ㅎㅎㅎㅎ

  "정림 아주머니가 쓴 글 읽었지?"
 작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림은 여성들에게 경제적 자립이 왜 중요한지 알기 쉽게 써놓았다. 
 "네, 저도 나중엔 정림 아주머니 말씀처럼 일과 글을 아끼는 사람이 될 거예요."
 작희는 열한 살 이후부터 문장으로 이야기를 지었다. 어머니를 따라 글을 짓다가 어느 순간 서포에 있는 책을 읽었다. 서포에 있는 셀 수 없이 많은 선생이 작희가 글을 완성하는 데 조력자가 되었다. 
 "어머니, 사람들의 마음에 불이 붙는 글을 쓰고 싶어요."
 "불이 붙는?"
 "네, 마음이 막 뜨거워지는."
 중숙이 빙긋이 웃으며 작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꼭 그런 글을 네가 원하는 날까지 쓰거라."   p.76

 중숙의 삶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된 개였지만 딸과의 소중한 시간을 누릴 수 있었고, 서포를 운영하며 바깥 활동을 할 수 있게된다. 물론 여기에 덕분이라는 단어를 붙이고 싶지는 않다. 

  "작희야, 너희 엄마가 서포를 한다고 할 때 내가 어깃장을 좀 놓았잖니. 여자가 무슨 일을 하냐고. 그런데 내 신세가 이리 되고 보니 네 엄마가 참 대단한 사람 같단 생각이 들어."
 작희는 고모의 이야기를 다 듣고 기억에 남는 글을 고모에게 전했다.
 "고모, 어머니의 학동이 쓴 글을 읽었거든요. 그 글엔 남편한테 의지하지 말고 경제적 독립을 해야 진정으로 자기 해방을 한다고 쓰여 있었어요." 
 경혜는 '해방'이란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작희는 다른 이야기를 하나 더 찾아 고모에게 설명했다.
 "하나님이 목숨을 주실 때 남성을 더 우대하고 여성을 더 천하게 만들지 않았대요."
 평등에 관한 이야기를 하던 작희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남자한테 경제적으로 의존하면 다른 부차적인 것들도 종속이 된다고."
 경혜의 눈이 몇 번인가 끔뻑였다. 
 "작희야, 다는 아니지만 조금은 알 것도 같구나."   pp.99-100

 저마다 처한 상황이 다를 뿐 갈증을 느끼고 있는 여성들이 어느 순간 모이게 되고 연대하게 된다. 그 연대의 힘은 누군가의 위안이 되고 구원이 된다. 

 "어머니 글을 멋졌어요. 그렇게 시원시원한 인물들은 사실 요즘 소설에 없었어요. 지금 소설들은 너무 멋을 부리는 것 같은데, 어머니 소설은 그렇지 않았어요. 어머니가 홍계월전과 박씨전을 좋아하셔서 저도 다시 읽어봤어요. 정말 훌륭한 작품이에요. 그러나 아쉬운 게 있어요."
 중숙의 시선이 조금 움직인 것도 같았다.
 "작가의 이름이 없다는 거요. 그걸 최초로 구상한 사람은 누굴까요. 훌륭한 작품을 만들었지만 이름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많잖아요. 그쵸? 어머니도 그렇고요. 어머니가 쓴 소설을 올해 신년문예에 낼 거예요. 제 소설도요. 당선이 되면 좋겠지만 안 되어도 저는 계속 글을 쓰려고 해요. 아무리 어려운 일을 만나도 쓰는 여자로 살 거예요."
 중숙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작희는 그런 어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   pp.116-117

 자신의 욕망이 무시당하는 시공간에 있던 작희에게 유일한 안식처였던 어머니의 죽음. 이제 작희는 모든 순간을 스스로 선택해서 나아가게 된다. 자신의 욕망을 소중하게 드러낼 것인지 잘라버릴 것인지... 어떤 선택도 정답은 없다. 그녀가 결정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서포에는 여학생들이 많이 찾아왔다. 어머니가 살아 계셨으면 작희도 그들처럼 공부를 시작했을 것이다. 작희는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크게 낙심해선 안 되는 일이 아닌가. 비록 학교에는 못 갔지만 독서회등에는 꼭 찾아나섰다.  p.121

 작희는 아버지를 두고 종로통에서 문전성시를 이루는 탕국집으로 가 국물 하나 남기지 않고 밥을 먹었다. 작희가 수저를 놓은 후 트림을 하자 탕국집에서 밥을 먹던 남자들이 무슨 연유인지 '되바라진 년'이라는 소릴 했다. 남자도 대동하지 않고 그것도 여자 혼자 아무 거리낌 없이 밥을 먹는 게 그들 눈에는 속이 뒤틀릴 정도로 거슬리는 모양이었다. 작희는 남자들을 경멸하는 눈으로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내가 되바라진 년이면 당신들은 여자나 깔보는 치졸한 놈들이겠지.  pp.124-125

 개는 사람의 아비될 수 없다. 작희에게 반면교사가 아닌 좋은 남성의 덕목을 갖춘 남자 어른이 있었어도 자기 욕망만이 중요한 쓰레기를 거를 수는 없지. 쓰레기를 거르려면 쓰레기도 만나고 아닌 남성도 만나고 많이 만나면 거를 수 있으려나? 

 "아니요, 미쿠니 아파트에 사는 두 여자 이야기예요. ...... 제 어머니는 특히 글쓰기에 대한 욕망을 잘 키우라고 가르치셨어요. 글쓰기의 욕망은 생물과 같다고."  p.147

 "어머니는 정말 이야기 쓰기를 사랑한 사람이에요. 저도 마찬가지지만 어머니만큼은 아닌 것 같아요. 그리고 저와 어머니가 다른 면이 있다면 어머니는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고 싶은 마음이 없었어요. 어머니는 쓰는 것 자체에 만족하는 사람이라서요. 자신의 글이 설사 타인에게 읽히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행복하다고 하셨어요." 
 "그럼, 작희씨는요?"
 "저는 좋은 이야기를 쓰고, 그 이야기가 가능하면 많이 읽히고, 더불어 제 이름도 알리고 싶어요. 이게 제 욕망이에요."
 작희는 솔직한 마음을 스스럼없이 이야기하는 자신에게 놀랐다. 영락과 눈이 마주쳤다. 그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흘렀다. 그는 다정한 어조로 작희를 불렀다.  p.148

 아... 정말 욕하고 싶은 놈. 그의 표절은 그를 다른 사람으로 만든 사건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본 모습을 드러내게 해 준 해방의 사건이었다. 그는 교육에 의하여 그럴듯한 포장지를 두르고 있었으나 곧 그 가식마저 버린다. 개보다 못한 쓰레기.

 "글이 안 써질 때 억지로라도 써야 할까요?"
 "반반입니다."
 한구가 단호히 말했다.
 "반반이라면?"
 "반은 맞고 반은 아니란 말씀입니다.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하고, 인물의 세세한 이력까지 정리가 끝났다면 계속 앉아서 써야 합니다. 이때는 쥐어짜내도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천천히 빈 잔에 술을 채웠다.
 "말하고자 하는 바도 없고, 인물도 모호하고, 이를테면 주인공은 나의 분신인데, 분신의 생김새나 말투나 지나온 시간 같은 게 모호하고, 주변 인물들도 제대로 생성하지 않은 상태에서 엉덩이를 붙이고 한 글자 쥐어짜는 건 쓰는 자도 읽는 자도 힘들기만 한 결과물을 냅니다."  pp.155-156

 서포로 돌아온 작희는 불편한 원피스를 벗고 통치마와 저고리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탁자 앞에 앉아 쓰다만 글을 꺼냈다. 글은 민감한 성정을 가진 살아 있는 생물 같았다. 사정이 생겨 몇 주간 글을 쓰지 못했더니, 무너데 알은척을 하냐는 듯이 토라져 한 문장도 쓸 수 없게 만들었다. 글에서 떠나온 시간만큼 정성으로 달래고 시간을 들여야만 그때서야 겨우 마음을 주는 것 같았다.   p.158

 "근데 왜 글을 쓰려고 하는 거예요?"
 미설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작희는 뜸을 들였다. 
 "내가 왜 글을 쓰냐면......나만 아는 세계가 있어요. 그 세계를 여럿이 함께 알고 싶어서 글을 쓴다고 하면 이해가 되나요?"
 미설은 알 듯 말 듯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점예가 깊은 생각에 잠겼다 깨어난 것 같은 얼굴로 작희와 미설을 돌아보았다. 
 "나도 가끔은 뭔가가 막 쓰고 싶어질 때가 있었어. <군용열차>라는 영화를 보고 난 밤이었지. 퍼뜩 떠오르는 걸 막 적었어. 거짓말 안 하고 종이 석 장은 적었던 것 같아. 그런데 다다음날 인가, 왜 이걸 시작했나 싶기도 하고, 어떻게 끝을 내야 하는지 전혀 떠오르지 않는 거야."
 "그래서요, 결국은요?"
 "그게 끝이야. 그때 느겼단다. 누구나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것. 그러나 끝을 쓰는 사람만이 작가가 된다는 것."
pp.216-217

 누구나 자신만의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 자신만이 만들 수 있는 세계. 난 그들의 세계를 알게되는 순간들이 재미있다.

 "이렇게 한들 무엇이 달라지겠어요?"
 여자의 음성이 가늘게 떨렸다. 작희는 여자 옆으로 가서 앉았다.
 "아무것도 안 하면요? 아무것도 안 하면 정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      p.219

 "미쿠니 아파트는 제가 쓴 미쿠니 주택이에요. 제 글을 그대로 가져다 발표했어요."
 계연이 작희의 눈을 한동안 응시했다.
 "지금 제가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그 소설의 대문자 J는 제 어머니 중숙이고 소문자 j는 작희 저예요."
 계연은 한동안 묵묵히 침묵을 지키다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말도 안 돼. 어떻게 그런 버러지 같은 짓을!"
 계연이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증명할 수 있니? 증거가 있어야 해! 계연이 이렇게 말할 줄 알았는데.
 작희는 쏟아지는 눈물을 감추질 못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울음이 작희의 말을 삼켰다.  p.232

 "저는 패배했어요. 세상에 졌고, 제 글도 저 때문에 패배한게 맞아요."
 계연이 발을 멈추고 작희를 보았다.
 "글이 너에게 뭘 해줄 거라 바라고 글을 쓴 건 아니지 않니? 그냥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괴로울 때나 행복할 때나 매일같이 쓴다고 하지 않았어? 네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사는거지. 작희야, 그렇게 글에 기대 사는 거다."
 작희는 발끝만 내려다보았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사실, 이 말은 네 어머니가 나한테 해준 말이야. 내가 너에게 이런 말을 해준다는 게 참 묘하다."   p.249

 "증명하기가 참 힘들 거다."
 "......"
 "내가 보니 오영락은 주변에 사람이 많아. 그를 돕는 사람들 중에 문인도 많고 심지어 일본 제국주의를 맹렬히 비판하는 공산주의자들도 있어. 그들은 오영락의 잘못을 한 번의 실수로 눈감아주자고 주장할 거야. 어쩌면 거기서 끝나지 않고 너에게 함구하라고 강요할 수도 있고, 아니면 너를 창녀로 만들고 모함할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너는 힘이 없지만, 오영락은 이미 하나의 권력이 돼버린 사람이야. 오영락은 이제 네가 사랑했던 옛날의 그 오영락으로 보면 안 된다."  p.251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싸움을 작희는 피하지 않는다. 아버지로 존재한 적도 없는 아비지만 자신의 미래와 그를 두고 저울질조차 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기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에 따라 살아가고 받아들이며 싸운다. 깨어있는 척 하는 영락과 같은 자들... 욕도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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