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서)기

언니

쫌~ 2022. 3. 14. 23:31

지금은 아무 의미도 담지 않고, 나이 많은 직장 동료들에게조차 쓸 수 있는 '언니'.

나와 6살 차이나는 언니가 있었다.
몇 년에 한 번 보게 되는 동생인 나는 붙임성도 없고 낯가림도 심한 재미없는 아이였음에도 나와 보내는 시간(고등학생때 초등학생이랑 놀아준다는 것은 엄청난 희생이다)을 진심으로 즐거워했다. 신나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주던 언니를 무척 좋아했다. 나에겐 연예인이었다. 무척 이쁘다고 생각했고, 언니가 읽는 책, 듣는 음악, 사용하는 물건들 심지어 방에 놓인 가구의 구조까지 다 너무 멋지고 닮고 싶어했다. 좋아하는 스타의 사진을 갖고 다니는 것처럼 지갑에 늘 넣고 다니던 사진이 있었다. 아마 대학생 때 사진이었던 것 같다. 제주도 천지연 폭포 앞에서 하얀 반팔 티셔츠 위에 남색에 하얀 땡땡이 끈 원피스(도트 무늬라고 말하면 그 느낌이 살지 않아)를 입고 찍은 사진. 귀퉁이가 나닥나닥해질때까지 들고 다녔다. 성적이 썩 좋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당시 나에게는 가장 똑똑한 사람이었다. 배낭여행의 꿈을 심어주었고, 유희열의 음악을 들려주며 덕질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 알려주고, 맞다. 내게 번개탄을 이용해 연탄에 불 붙이는 법을 설명하며 능숙하게 연탄을 갈던 멋진 어른이었다.

언니에겐 힘든 일들이 많았다. 꼬맹이때부터 강단있기로 유명했던 언니가. 기운이 너무 쎄서 이름으로 눌러야한다며 호적용 이름이 있고 집에서 부르는 예쁜 이름이 있던 언니가.(난 호적용 이름이 좋았다. 이름이 너무 강하고 이쁘지 않다고는 했지만 언니에게 어울리는 이름이라 생각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일도 해보자면 덤비던 언니가. 한없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그때는 어려서 그리고 멀리 떨어져있어서... 무엇을 어찌해야할지 모르겠다는 핑계로 도망쳐서 멀리 떨어져있었다. 언니의 감정을 가늠하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좋아하면서도 멋지다고 생각하면서도 한 번도 이야기한 적이 없었듯이
힘들다고 이야기할때도 여러번의 좌절을 보면서도 위로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게 왜 그렇게 어려웠을까?

결정적으로
직장을 옮겨 이제 지척에 살게되었는데
딱 한 번
만났다.
병원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 딱 한 번 병문안을 갔다. 멀지도 않았는데. 매일 들러도 되는 거리였는데.
어색했고
속상해서
도망쳤다.
신경 쓰지 않으려고 온 마음을 다른 곳에 던졌다.

언니의 장례식에서 적당히 슬프고 적당히 눈물을 흘렸다.
슬펐다. 다른 사람에게 일어났어도 슬픈 일인 적당한 이유들로 슬펐다.

그런데
진짜 슬픔은 작년에 찾아왔다.
몇 년이나 지났는데
말할 수도 볼 수도 없다는 것이 너무 갑자기 크게 느껴져서 밤새 울었다. 그 날 난 언니의 죽음이 진짜가 된거였다. 몇 년이 지나서야.

그때는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었지만
피하는데 온 힘을 쏟았고
지금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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