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운에게는 뭉치. 지우에게는 용식. 소리에게는 엄마.
채운에게 지우와 소리. 그리고, 엄마가
지우에게 소리와 채운. 그리고 선호 아저씨가
소리에게 지우와 채운. 그리고 아빠가
마지막 끈이라고 생각하던 것이 끊어졌을 때, 아공간에 홀로 떠 있다고 생각한 그 순간 희미하게 보이던 다른 끈이 선명해지기 시작한다. 영원한 관계는 없다. 유한한 존재이기에 언제까지고 함께 할 수 없기도 하고, 어느 순간 관계성이 달라지기도 한다. 소리처럼 스스로를 고립시켜 자기를 지키기도 하고, 채운처럼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회피하기도 한다. 지우처럼 자신을 던져 소중한 무엇을 지키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어떤 방식이든 외롭고 막막하다. 나를 향한 또 다른 손들이 있음을 알기 전까지는... 등장 인물들이 보여주는 이야기는 한 문장 한 문장 힘들다. 소리와 채운의 첫 만남 장면, 지우가 들려주는 소리와의 첫 기억, 채운의 모든 순간에 함께하던 뭉치의 모습마다 용식을 대하는 지우의 모습마다 슬펐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슬프고 절망적이어도 살아가리라는 것을. 함.께. 채운, 지우, 소리는 각자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혼자는 아니다. 나도 그들과 함께 살아갈 것이다.
순간 소리의 두 눈이 반짝였다.
- 그래? 넌 이야기가 왜 좋은데?
지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 끝이......있어서?
소리가 신기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 난 반댄데.
- 뭐가?
- 난 시작이 있어 좋거든. 이야기는 늘 시작되잖아.
지우가 잠시 먼 데를 봤다.
- 이야기에 끝이 없으면 너무 암담하지 않아? 그게 끔찍한 이야기면 더.
소리도 시선을 잠시 허공에 뒀다.
- 그렇다고 이야기가 시작조차 안 되면 허무하지 않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잖아. p.66
지우가 잠시 숨을 가눈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 가는이란......
지우는 문득 교실 안이 조용해지는 걸 느꼈다.
- 가난이란 하늘에서 떨어지는 작은 눈송이 하나에도 머리통이 깨지는 것.
지우는 여전히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지만 조금 의연해진 투로 다음 문장을 읽어나갔다.
- 작은 사건이 큰 재난이 되는 것. 복구가 잘 안 되는 것......
생활 글이었다면 안 그랬을 걸 시라 해서 무심코 적어 낸 문장이었다. p.85
손에 이상을 느낀 뒤로 소리는 그림에 대한 자신감을 더 잃어갔다. 그림이 즐거움을 주는 대상이 아닌 타인과의 접촉을 피하는 수단이 되다보니 그랬다. 그런데 최근 지우에게 줄 선물을 준비하며 소리는 자신이 오랜 시간 잊고 지낸 재미와 기쁨을 느꼈다. 내가 특별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과 무언가를 나누고 싶어 그리는 그림은 오랜만이었기 때문이다. p.130
지우가 볼 때 용식의 멋진 점 중 또하나는 탈피였다. 지우는 여전히 자신인채, 그러나 허물을 벗으며 보다 선명해지는 방식으로 성장하는 용식이 대견했다. p.201
소리 생각에 용식을 의인화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용식은 지금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거기 그냥 있으면 됐다. 중요한 건 여러 번의 계절을 나는 동안 지우가 용식을 깊이 봐온 것만큼 용식 또한 지우를 계속 지켜봤음을 지우에게 알려주는 거였다. 서로 시선이 꼭 만나지 않아도, 때론 전혀 의식 못해도, 서로를 보는 눈빛이 얼마나 꾸준히 그리고 고요히 거기 있었는지 보여주는 거였다. 그러니까 말이 아닌 그림으로. 그렇게 그저 시점이 바뀐 것만으로 지우가 무언가 알아챘음 싶었다. 비록 그게 지우가 이미 아는 걸 한번 더 알려주는 거라 해도. 그런 앎은 여러 번 반복돼도 괜찮을 것 같았다. p.132
네 아빠는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으니까. 인생에 좋은 일이 있을 때만 곁에 있는 이들을 우리는 아첨꾼이라 부르지 가족이나 친구라고는 안 하잖아? 희생과 인내가 꼭 사랑을 뜻하는 건 아닌데, 그때 나는 이해라는 이름으로 내 안의 두려움을 못 본 척했던 것 같아. 진실을 감당하는 데는 언제나 큰 용기가 필요하니까. p.176
그런데 이제 나는 네가 골목 안으로 들어가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해도 울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 눈앞에 출구가 보이지 않을 때 온 힘을 다해 다른 선택지를 찾는 건 도망이 아니라 기도니까. 너는 너의 삶을 살아. 채운아. 나도 그럴게. 그게 지금 내 간절한 소망이야. 이건 희생이 아니란다. 채운아. 한 번은 네가, 또 한번은 내가 서로를 번갈이 구해준 것뿐이야. 그 사실을 잊지 말렴. p.182
지우의 머릿속에 용식과 보낸 많은 시간이 빠르게 스쳐갔다. 그런데 아무리 되새겨도 용식에게 잘해준 것보다 못해준 게 더 많은 것 같았다. 특히 최근 용식을 보살피지 못한 게 제일 미안했다. 결국 용식을 이렇게 만든 것도 자기 잘못 같았다. 지우는 한시라도 빨리 도착해 용식을 편안하게 해주고 싶었다. 그게...... 살아 있는 용식이 아니라 해도. 절대 그럴 리 없고 그러지 않기를 바랐지만 마음속에서는 이미 자신이 용식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았다. 하지만 그전에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p.214
꿈에서 나는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돌아왔다. p.235
내 소중한 민수와 함께. 프레임 밖에 있어 보이지 않아도 연수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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