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려주고픈

사면초가

쫌~ 2023. 11. 23. 11:10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부터 해야 할까? 아니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이제 겨우 그동안의 노력들이 형태를 들어내기 시작하는데...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던 것일까?(이 생각은 더 수렁으로 이끈다. 무엇이 문제였는지 알아야 답을 찾는데. 지금 상황에서는 오히려 독이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하자.(뭘 할 수 있을까?)

가제본 서평단으로 출간(11.20 출간)전에 받아 든 책. 아주 오랜만에 읽는 이야기 책. 이야기의 흡입력이 대단하다. 이야기 속 인물들이 처한 상황이 너무 현실적이어서 바로 그 상황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영국의 하원의원인 주인공. 뭔가 내 세계와는 동떨어진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그녀가 일상에서 느끼는 위협, 공포, 두려움, 망설임, 설렘은 지금 내가 여기서 느끼는 상황과 다를 바 없다.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지만 각 인물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설정이 이야기의 힘을 갖게 한다. 바로 지금 내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 부끄러운 일이지만 너무 서슴지 않게 행하는 일. 이중 잣대와 혐오

"에이미가 가족들에게 남긴 유서에는, 자신이 가족에게 가져다 준 수치심과 더불어 언제까지나 그 영상 속 여자로 알려질 거라는 사실을 견딜 수 없다는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p.71

사람들에게 자신을 보여주면서 살아가는 사람에게 나는 어떤 시선을 던지는가? 그들이 보여주는 것들이 그 사람의 삶 전부를 대표하는 것은 아닌데... 누군가 나의 일부로 어느 한순간의 장면으로 나의 삶 전체를 평하고 논한다면... 😤😾
나는 '나는 솔로'를 꽤나 재미있게 봤었다. 일반인 출연자들이 주는 가까운 지인과 같은 느낌에 대중의 관심에 반응하는 연예인급 퍼포먼스들이 재미었다. 함께 봤던 사람들과 욕도 하고 인터넷에 떠도는 그들 찐 지인(알 수 없지만 그렇게 믿고 싶으니)들이 들려주는 험담까지 누군가의 일면을 보고 그들의 삶을 그렇게 정의했다. 재미있게 봤던 프로그램인데 16기 이후에 하차하였다. 피로감이 너무 😅

별일 아니야. 한심한 짓일 뿐이야. 이 일을 엄마에게 알리면 엄마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당연히 알릴 생각은 없지만). 요즘 10대 애들이 어떤지 엄마는 모른다. 툭 던지는 댓글과 날 선 농담은 치익 하고 그어지는 성냥불과 같았다. 순식간에 삶 전체가 화염에 휩싸였다. ...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에서 덤블도어가 네빌에게 어떤 말을 했던가? 적에게 맞설 때만큼 친구에게 맞설 때도 용기가 필요하다고 했다.  p.91

어른들은 쉽게 생각한다. 아이들의 세계가 자신들의 세계만큼 복잡하고 어렵다는 것을 잊는다. 그리고 아이들의 세계는 훨씬 잔인하다. 동심이라는 말이 주는 이미지는 잠시 접어둬야 한다. 이슈가 되는 일부 10대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아이들의 세계는 날카롭다. 아직 자신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서로가 어느 정도의 거리감을 유지해야 하는지 익혀나가는 시기여서 정제되지 않은 말과 행동이 난무한다. 어떻게 아이가 저런 말과 행동을 하지? 한다. 말과 행동이 어떤 영향을 주는지 배우면서 점점 어른이 되어 간다. 사회화의 과정이다. 예전에는 가정에서, 동네에서, 학교에서 또래들과 또래가 아닌 이들과 함께 어울려 배우고 가르치는 시공간이 많았지만 지금은... ☹️ 
플로라가 처한 상황을 보여줄 때마다 가슴이 답답했다. 플로라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견디는 것 외에. 우연히 알게 된다면(아이들이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아무리 교육을 해도...) 교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부모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플로라의 행동을 마냥 비난할 수도 그렇다고 옹호할 수도 없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명확한 경우가 아닌 피가해자들에게 어떤 도움을 제공해야할 것인가? 내가 상처받았으니 너에게 상처 주는 행위는 당연한 것이 아니냐는 논리가 얼마나 개소리인지 알지만 그렇다고 마냥 묵과할 수도 없는 일 아닐까? 

딸에게는 모든 것이 다 괜찮아질 거라고 -너를 지지한다고, 그렇게 해선 안 되었지만 그런 행동을 했다고 네가 끔찍한 사람인 건 아니라고, 학교에서 2주 정학 처분을 받았지만 이겨낼 수 있다고-안심시켰지만, 내 아이가 다른 여자아이에게 그런 짓을 저지른 것에 깊은 수치심을 느꼈다.
 그렇다고 레아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는 건 아니었다. 레아는 정말 맹랑한 계집애처럼 굴었다(플로라에게는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남학생인 척 속여 내 딸의 입에서 본인을 비하하는 말이 나오도록 유도했고, 내 딸을 조종했으며, 내 딸을 매력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는 뉘앙스를 풍기는 말을 했다("남자들은 가슴을 좋아해. 플로라"는 내 딸이 들었다고 털어놓은 모욕적인 말 중 그나마 무난한 축에 속했다). 또한 스냅챗 댓글 사태를 일으키고, 내 딸을 조롱하는 인스타그램 계정까지 시작해 모욕감을 안겼다. 플로라가 자신에게 행해진 조직적인 괴롭힘의 규모를 털어놨을 때, 나는 극도의 슬픔과 원시적인 분노를 느꼈다. 플로라가 한 짓은 내가 지닌 페미니스트 원칙들에 반하는 것이 없음에도, 왜 내 딸이 보복이 필요하다 느꼈는지 완벽히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딸의 이야기를 들은 순간 나의 첫 번째 반응은, 레아의 얼굴을 주먹으로 계속 내리치는 장면을 상상하는 것이었다. 곧장 떨쳐내기는 했지만. 그다음 반응은 분노를 억제한 것이었다. 플로라에게 내 분노를 전염시키면 안 되었다. 세 번째 반응은 당연하게도 상반신을 탈의한 어린 여자아이 사진을 전송한 내 딸의 행동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얼마나 역설적인 상황인지 잘 알고 있다. 누군가를 모욕할 의도였던 플로라의 행동은 내 정치 생활을 바쳐 싸워온 모든 것, 가장 극단적으로는 카일 그리핀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하지만 이런 사실과 별개로, 내가 부모 역할을 잘못했다는 죄책감과는 별개로, 레아에게 크나큰 동정심을 느꼈다.  pp.164-165

주인공의 심정이 잘 느껴지던 부분. 내 아이의 행동이 내가 굳게 믿고 이루고자 애쓰는 신념에 위배되는 행위를 했을 때... 이 아이의 행동을 자신과 떨어뜨려서 인정하기까지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굳이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내가 부모의 역할을 잘하고 있지 못하다는 죄책감을 늘 지니고 생활하던 엄마에게 자녀의 잘못된 행동에서 자신을 탓하지 않기란 쉽지 않다. 보통은 그 탓의 대상을 상대방이나 주변에 있는 다른 어른(학생이라면 대한민국에서는 담임을 탓하며 원망하고 물고 늘어진다)에게 전가시킴으로 자신의 죄책감을 벗어던지려고 한다. 최악이다. 먼저 그들에게 이야기해주고 싶다.
당신 잘못이 아니라고. 그러니 수치심과 죄책감은 성인인 당신이 떨쳐내고(쉽지 않지만 하나의 생명체를 키우는 일에 늘 뒤따르는 일이고, 당신은 감당할 능력이 되는 성인입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어린 생명체를 올바르게 양육하기 위하여 당신이 해야할 일들을 하자고.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은 저녁에도 이어졌다... 집 열쇠 꾸러미를 찾아 손에 쥐고는 손가락 사이 사이에 열쇠를 하나씩 끼웠다. 밤에 혼자 바깥에 나와 있는 여자들은 이렇게 해야 하니까.... 이렇게 까지 해야 한다는 게 억울하기도 했다. 가방을 꼭 쥔 채 택시가 멈추자마자 곧장 내릴 채비를 했다. 그의 면전에 대고, 나를 파헤치고 의심하고 평가하고 한 마디씩 해대는 모든 사람들의 면전에 대고 문을 쾅 닫아버릴 그 순간만 간절히 기다렸다.  p.187

2023년에도 여자들은 늘 경계한다. 앞으로 나의 아이가 사회의 구성원으로 제 몫을 하는 미래의 어느 날에는 밤에 혼자 바깥에 나와 있다고 두려움을 느끼고 신경을 곤두세우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리라.

정말 절묘한 장면에서 이야기가 멈추었다. 가제본 서평단으로 예고편을 먼저 본 이 몸은 출간과 동시에 주문.